2차 창작/글 11

커튼콜

더보기 초인종이 울렸다.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녘이었다. 아내와 딸은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로이드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이 방문하기에는 더없이 늦거나, 혹은 지나치게 이른 시간대였다. 이런 시간에 노크조차 않고 대뜸 초인종을 누른 것만 보아도 그 수준의 상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대임이 분명했다. 그는 앉은 채로 시선을 돌려 굳게 닫혀 있는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몇 분 가량의 침묵이 흘렀다.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현관 너머의 불청객은 좀처럼 물러가는 기색이 없다. 복도에서 가볍게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드는 읽고 있던 신문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가 흐릿한 불빛이 흔들리던 작은 전등의 스위치를 내렸다. "누구시죠?" 로이드는 현관을 향해 나직하..

2차 창작/글 2024.01.11

19N4

더보기 그것은 세상이 천천히 멈추는 꿈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 한 시를 가리킨 채 멈춰 있는 바늘을 눈치챈 것은 그녀뿐인 것 같았다. 봄비를 맞아 떨어지던 나뭇잎은 허공에 걸려 더 움직이지 않았다. 느릿하게 흘러가던 구름도 흐린 하늘에 조용히 고여 있었다. 길고 지루한 한낮의 어느 순간, 세상은 소리 없이 멈춰 버렸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재앙이었다. 꿈속의 그녀는 청사 뒤편의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소름끼치는 정적 속에서 문득 젖은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멈춘 시계탑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뒤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다가오던 그는 머리 위에 숨결이 느껴질 만..

2차 창작/글 2023.12.18

카프카

더보기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유리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어느 느지막한 저녁의 퇴근길이었다. 집 근처의 카페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주문하려던 유리는 카운터 앞에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에그 샌드위치 두 개와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그 간단한 한 마디가 입술에 걸려 달싹거리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손님?" 카운터 직원이 가볍게 채근했다. 유리는 말을 듣지 않는 목울대를 한 손으로 감싸쥐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젊은 여자가 약간의 짜증이 섞인 손길로 어깨를 건드렸다. 느닷없는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보다도 민망한 순간을 벗어나는 일이 먼저였다. 유리는 쩔쩔매다가 결국 도망치듯 카페를 나와 버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2차 창작/글 2023.04.11

[下] 낙화

더보기  어떤 미래는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소녀는 침대맡에 앉아 있는 반려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완전한 일몰이 지난 시각이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무구한 눈동자가 새카맣게 빛났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가 긴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내민 반려견이 축축한 혓바닥으로 뺨을 핥아 주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하얀 꼬리가 바닥을 쓸었다. 이불 끄트머리를 그러쥐었던 작은 손이 부드러운 털로 덮인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소녀는 곧 몸을 일으켜 짧은 다리로 바닥을 딛었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흘러든 달빛이 복도를 비추었다. 발소리를 죽여 아버지의 방 앞으로 다가간 소녀는 닫힌 문 위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었다. 아이의 머릿속에 괴롭고 난잡한 속삭임이 스멀스멀 흘러들었다.  얼마간 그러..

2차 창작/글 2023.02.06

[中] 잔화

더보기  다섯 시간 전이었다. 맞은편에 걸린 시계가 네 시 반을 가리켰다. 지금은 오전이던가, 오후던가. 타자기 앞에 앉은 젊은 국원의 피곤한 눈이 초침을 좇았다. 평소만큼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표류한 시간을 되짚었다. 콘크리트 벽이 사방을 둘러싼 이 건물 내에서는 낮과 밤을 가늠하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처음 여기 앉았을 때가 정오였으니 지금은 아마 늦은 오후다. 장장 네 시간이 넘도록 꼼짝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고개를 숙인 그가 마른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여태 제목조차 붙이지 못한 보고서에 단 한 글자도 적어 넣지 못했다. 손가락 사이로 넋이 나간 눈동자가 책상 끄트머리를 응시했다. 타자기 앞에 뿌리를 박은 듯 앉은 그는 오래도록 갈등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에 가까스로 깨..

2차 창작/글 2023.02.04

[上] 헌화

더보기  첫째 날, 초인종이 울렸을 때 그녀는 희미한 불운을 예감했다. 예복을 입은 보안국원이 집까지 찾아오는 것은 좀처럼 없는 경우였다. 체포라도 당하지 않을까 굳어 있는 그녀에게 통지관은 반듯한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 종이를 펼친 후에도 그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브라이어 소위? 그런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군요. 낯선 이름을 입에 담는 그녀의 눈이 소리 없이 깜박였다. 동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던 그녀였다. 고장난 인형 같은 얼굴로 동생의 마지막에 대해 들으며 그녀는 이질감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는 이야기였다.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 튼튼한 아이도 역시 머리를 다친 건 어쩔 수 ..

2차 창작/글 2023.02.03

외다리 병정

더보기 그는 쉬이 잊혀진다. 숨이 붙은 것들이 으레 가진 옅은 인기척조차 가볍게 죽일 수 있었다. 그는 낙엽 위를 소리 없이 걸었고 그늘 아래 고요히 녹아들었다. 길가에서 스친 그 흐릿한 얼굴을 한나절 이상 기억하기란 수월치 않았다. 무던하고 특출난 데 없는 인상에 매사 실없이 웃는 낯짝. 그는 쉽게도 유능한 밀정이 되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재능이라 불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재능을 망가뜨리기 위해 평생 부던히 노력하며 살았다. 코흘리개 시절에는 이것이 자신의 소극적인 성정에서 발현된 단점이라 생각했다. 머리가 좀 굵자 이를 부끄럽게 여겼고, 어울리지 않는 옷과 행실을 덮어쓰고 개성을 연기하곤 했다. 다만 나이가 드니 요즘은 그마저도 부질없음을 깨달았는지 제 삶을 거스르려 들지 않는다. 모난 데 없이 ..

2차 창작/글 2022.03.15

잔열

더보기 그는 볕이 들지 않는 자리에 죽어 있었다. 닳아 부러진 손톱으로 흙바닥을 움킨 채 텅 빈 시선만을 위로 한 얼굴이 그늘 아래서 맥없이 이쪽을 응시했다. 눈길이 닿자 늦여름 더위에 반쯤 녹아내린 눈동자가 반가이 미소짓는다. 오래 기다렸어요? 수백 번을 그렸던 목소리가 꿈틀거리는 목구멍 밑에서 나직이 속삭이는 듯한 착각. 그녀는 홀린 것처럼 다가가 그 곁에 천천히 허물어졌다. 하염없이 흘려보낸 여름과 시야가 이지러드는 더위의 끝자락에서 연인의 초라한 마지막을 마주한다. 웃는 듯 보였던 마른 입꼬리를 쓸자 벌어진 입술 새로 날벌레가 들끓었다. 힘에 겨워 뱉은 옅은 숨결조차 머리 위를 뒤덮는 매미 울음소리에 묻혀 사그라들었을 어느 외로운 여름. 멎었던 시스템이 과열된 모터를 굴려 사고하기 시작했다. 어지..

2차 창작/글 2021.08.19

바다의 노래

더보기 변덕이 심하기로 새벽녘의 바다를 따라올 것이 있을까. 해군이라는 직업은, 어쩌면 바다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다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바닥만한 조각배에 몸을 실은 노련한 정찰병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는 이미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닥치는 파도 위에서 키를 붙든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감이 좋고 몸이 잽싸 정찰병이라는 직책을 얻은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스스로의 감을 지나치게 맹신한 모양이었다. 괜한 만용을 부렸나, 초저녁부터 공기가 눅눅한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굵어진 빗방울이 하얗게 질린 뺨이며 콧잔등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뒤늦은 후회 대신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돛대를 힘줄이 돋도록 부여잡았다. 수영이라면 제법 자신이 있었다. 해군이라..

2차 창작/글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