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유리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어느 느지막한 저녁의 퇴근길이었다. 집 근처의 카페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주문하려던 유리는 카운터 앞에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에그 샌드위치 두 개와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그 간단한 한 마디가 입술에 걸려 달싹거리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손님?"
카운터 직원이 가볍게 채근했다. 유리는 말을 듣지 않는 목울대를 한 손으로 감싸쥐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젊은 여자가 약간의 짜증이 섞인 손길로 어깨를 건드렸다. 느닷없는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보다도 민망한 순간을 벗어나는 일이 먼저였다. 유리는 쩔쩔매다가 결국 도망치듯 카페를 나와 버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유리가 다시금 목 위에 손을 얹었다. 빈 손으로 귀가했으니 그날 저녁은 굶어야 했다. 다행히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대신 두서없는 당황스러움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날 오전의 일을 떠올려 봐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퇴근 전 사수에게 업무 보고를 올릴 때도 목소리를 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며칠 과로했더니 독한 감기라도 걸렸나?
아니면 성대에 갑작스레 문제가 생겼나?
유리는 앉은 채 초조하게 발을 굴러댔다. 온몸의 신경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에 집중하고 소리를 내 본들 소용이 없었다. 소리 없이 욕지거리를 하던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갈 곳을 잃은 걸음이 잠시 침대 주변을 방황했다. 병원으로 가야 할까? 불안해진 시선이 겉옷을 걸어 둔 행거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가슴께가 뻐근할 정도로 두근거려서 외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가 놓인 협탁 앞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꽉 쥐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다이얼을 돌렸다. 짧은 신호음이 흐르던 건너편에서 이내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포저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귓가에 스며들었다. 유리는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서러움이 곤란함으로 바뀌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음성이 없는 전화가 소통이 될 리 없었다. 목소리가 안 나와, 누나. 그 한 마디를 전할 수가 없어서 그는 얼굴이 벌개지도록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아까의 카페 직원 앞에서 느꼈던 당혹감이 다시금 온몸을 덮쳤다. 유리가 머뭇거리는 동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천진하게 물었다.
「여보세요? 누구신가요?」
유리가 다급하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여전히 목소리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한쪽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누구 전화?」
「모르겠네요. 장난 전화일까요?」
잠시 두런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는 맥없이 끊겨 버렸다. 유리는 붙들고 있던 수화기를 느릿하게 내려놓았다. 혼란스러운 머리에 몰려 있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걸음걸이가 다시 침대맡으로 향했다. 그는 차게 식은 이불 속에 몸을 끼워넣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유리가 소리 없이 입안으로 되뇌었다. 어쩌면 단발적인 증상일지도 몰라. 분명 너무 피곤해서 그렇겠지. 자고 일어났을 때 이 기이한 현상이 탈없이 돌아와 있길 기대하며 유리는 눈을 꾹 감았다.
기대와 달리 다음 날은 평소처럼 보낼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초조한 낯으로 일터에 출근한 유리는 표정과 몸짓만으로 겨우 상황을 설명해냈다. 사수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리의 제복 겉옷을 빼앗은 사수는 당장 병원부터 다녀오라며 그를 쫓아 보냈다. 퇴근 시간 전의 환한 대낮에 길거리로 내쫓긴 것은 오랜만이었다.
할 일을 잃은 유리가 터덜터덜 시내 중심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해가 떠 있어서인지 어제보다는 기분이 나았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 이비인후과 의사는 그의 목구멍 안쪽을 한참 빛으로 비추어 보거나, 용도 모를 기구로 건드려 보거나 했다. 희끗한 눈썹 사이가 살짝 구겨졌다. 아무래도 그는 유리의 묵묵한 목구멍으로부터 어떠한 문제도 진단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발성기관에 별다른 이상은 없네요."
목구멍 안을 비추던 펜라이트를 끄며 의사가 입을 열었다. 유리는 힘이 잔뜩 들어간 턱을 꾹 다물었다.
"심리적인 요인일지도 모르겠군요.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으니 한동안 안정을 취해 보세요."
돌팔이 의사라고 비난하고 싶었지만 유리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기도 너머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병원에서 얻은 것은 종이 봉투에 든 안정제 몇 알이 전부였다. 의학을 전공하진 않았어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다. 이 따위 알약이 갑작스레 사라진 목소리가 돌아오는 데 도움을 줄 리 없었다. 유리는 나오는 길에 병원 로비의 쓰레기통에 그것을 던져 버렸다.
그러고 나면 덜컥 겁이 났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한다면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유리는 쉽사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봐 상가 건물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얼마간 걷다 보면 한적한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공원의 가장 구석에 놓인 벤치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대로 해질녘이 될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느새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며 공기가 쌀쌀해졌다. 유리는 코끝을 훌쩍이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문득 누나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몇 정거장 거리에 있는 누나의 집으로 향하는 대신 몸을 돌려 집 쪽으로 걸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여전했지만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은 틀림없이 누나에게 염려를 끼칠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걱정해 줄 누나를 만나도 괜찮다는 위로 한 마디 건네지 못한다. 사랑하는 누나에게 그런 무력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아파트 건물로 들어선 유리는 짧은 고민 끝에 옆집 문을 두드렸다. 예고 없는 방문에 놀란 얼굴을 하는 도미니크에게 방금 막 휘갈긴 쪽지 한 장을 건넸다. 목소리가 안 나오게 됐어요. 누나한테 전해 주실래요? 입술을 우물거리던 유리가 손끝으로 마지막 문장을 톡톡 두들겼다. 당분간은 안부 연락이 어려울 것 같다고.
다음 날은 물론 습관처럼 출근을 했다. 어깨를 툭 건드린 사수가 병원은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유리는 얼른 고개를 들고 싱거운 표정을 지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사수가 집에서 좀 쉬라고 타박을 했지만 어제처럼 매몰차게 내쫓지는 않았다. 그날은 온종일 내근이었다. 사무실 구석에 틀어박혀 일에 몰두하다 보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잠깐이나마 유리는 자신이 아직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유리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마주했다. 현관 앞에서 요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
계단 끄트머리에 선 동생을 발견한 요르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와락 몸을 끌어안으며 등허리를 쓸어 주는 요르의 눈가가 약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린 것 같진 않았다. 유리는 어떻게 왔느냐는 질문도 하지 못하고 놀란 입술만 달싹거렸다. 요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청에서 들었어요. 어제 전화를 한 것도 유리였나요?"
유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들어 누나를 마주 안아 주며, 그는 아침에 직장 동료로부터 당황스러운 소식을 전해 듣는 누나를 상상해 보았다. 걱정이 한가득 담긴 놀란 눈으로 울상이 된 누나. 이윽고 집에 온 어머니의 등을 작은 손으로 쓸어 주며 괜찮다고 위로하는 밉살스러운 조카의 얼굴도 떠올렸다. 까치발을 들고 눈물을 닦아 주려는 어린 딸을 안아올리는 누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장면을 떠올리니 조금 안도가 되었다. 걱정이 많은 누나에게는 언제나 그녀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소리 없이 달싹거리던 입술이 이내 차분하게 다물렸다. 누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이 풀어졌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드 씨께 상담을 했거든요. 가장 놀란 건 역시 당사자일 테니, 찾아가서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안타까운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동생을 바라보다가, 요르는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한쪽 뺨을 정성껏 쓸어 주었다.
"괜찮을 거야, 유리.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에요. 사고라도 당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요르는 집안까지 들어와 동생이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삼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남매는 대화를 더 나누진 않았다. 유리가 조용히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다 비울 때즘에서야 요르는 느지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현관까지 자신을 배웅하러 나오는 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커다란 두 눈이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쩐지 전보다 생기가 없어 보이는 동생의 안색을 찬찬히 훑었다. 이내 입술을 연 요르가 다정하게 덧붙였다.
"소중한 내 동생.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다른 어떤 일이 생겨도……."
한없는 애정이 담긴 속삭임에 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지는 중에도, 영리하게 돌아가는 머리에는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하여간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시건방진 정신과 의사 놈. 자신의 심리를 꿰뚫는 듯한 저 능숙한 위로는 매형이 일러 준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어린 처남이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짚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누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유리는 슬쩍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안으로 들어온 유리는 조용히 현관을 닫았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잠시 문에 등을 기대어 서 있었다. 더없는 무력감에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잃은 것 따위는 더 이상 아무래도 좋았다. 다시금 겨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누나는 걱정스러운 일이 생겨도 자신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조언을 구할 상대가 있었다. 힘들 때나 괴로울 때나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줄 가족이. 유리는 갑작스레 목이 고장나버린 동생의 걱정을 털어놓는 누나를 떠올려 보았다. 맞은편에 앉아서 그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매형의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 본다. 그리고 무심코 다행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누나에게는 자신이 아니어도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유리는 불에 덴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아침에 울렸어야 할 알람을 듣지 못한 탓이었다. 탁상 위의 시계는 평소의 기상 시각을 20분 정도 놓친 숫자를 가리켰다. 얼마나 정신이 빠진 걸까.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전에, 유리는 찰나의 위화감을 느꼈다. 주변이 무서울 만큼 고요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새의 지저귐도, 이른 아침부터 도로를 누비는 자동차들의 소리도, 요란하게 박차며 일어난 침대의 스프링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당혹감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 넋을 잃은 유리가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물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목소리가 나지 않는 것인지, 귀가 듣지 못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유리는 맥없는 눈으로 시계를 응시하다가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급하게나마 출근하려던 생각은 깨끗하게 접어버리고 말았다. 목도 귀도 온전치 않아서야 일은커녕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 전에 병원에 가야겠다는 판단에조차 생각이 닿지 않았다. 짚이는 원인마저 없으니 의사에게 보인들 손에 쥐여지는 것은 이번에도 알약 몇 알이 전부일 것이다. 해일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유리는 침대 구석에 몸을 기대어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점심때가 가까워질 때까지 그는 침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사전 통보도 하지 않은 무단결근에 지금쯤 전화통에는 불이 나도록 연락이 오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전화벨이 울려도 들을 수가 없었다. 유리는 붉게 물든 눈으로 협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중에도 반나절을 굶은 신체의 반응은 솔직했다. 빈 속에서 뭉근한 허기가 느껴졌다.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없었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유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식탁으로 가는 대신 책상 앞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이때 유리는 이미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그는 더 늦기 전에 편지를 쓰기로 했다.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눈과 손은 아직 무사했다. 누구를 위한 편지인지는 명확했다. 유리는 편지지의 가장 상단에 누나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누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그녀가 있어 그가 얼마나 괜찮은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는지, 그런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싶었는지, 하지만 이제는 그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들이 생겨서 다행이라는 말 따위를 담백하게 적어내렸다. 심해 속에 잠긴 듯한 고요함 속에서 생각이 점차 분명해졌다. 자신은 분명 쓸모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내가 지켜보지 않아도 누나는 행복할 테니까 안심할 수 있어. 유리는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반듯하게 접은 편지지를 봉투에 넣어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부치러 나갈 수는 없어도, 언제든 누나가 집에 들러 주기만 한다면 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는 문 쪽으로 다가가 초인종이 울려도 듣지 못할 현관의 잠금쇠를 풀어 두었다. 그리고 물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랜 뒤,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정신을 세상과 분리시킨 채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요르는 남동생의 집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두어 번 정도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오늘은 분명 공휴일이었다. 동생이 쉬는 날까지 자진해서 출근할 만큼 성실한 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치 않은 몸으로 공휴일마저 일터에 나가 과로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옆집에 폐가 될까 싶어 문도 더 두드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요르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의외로 잠겨 있지 않았던 문은 달칵 소리를 내며 쉽게 열렸다.
컨디션이 나쁘더라도 문단속은 제대로 해 두는 편이 좋을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요르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벽 쪽을 보고 침대에 누워 있는 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드는 바람에 초인종을 듣지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요르는 그쪽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이내 유리가 몸을 돌렸다. 자다가 깬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진 쪽을 향하는 눈이 소리 없이 깜박였다. 누나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는 동공이 어쩐지 초점을 잘 맺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요르는 동생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깨어 있었어요?"
상냥하게 물어도 동생은 반응하지 않았다. 침대맡까지 다가온 요르에게 유리가 한쪽 손을 뻗었다. 허리께 근처의 허공을 더듬던 손이 곧 요르의 한쪽 손을 찾아 쥐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손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유리가 그녀의 손바닥이 위쪽을 향하도록 펼쳤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그 위에 글자를 그렸다.
누나.
요르는 동생이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이 손바닥 위에 만들어내는 문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편지가 있어.
유리는 짤막한 문장을 적고 쥐고 있던 손을 놓아 주었다. 편지? 요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 넓지 않은 집안을 둘러보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요르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보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편지였다.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된 편지의 내용은 갈수록 기묘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누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던 다정한 편지는 누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눈, 귀, 입 따위가 얼마나 쓸모없고 무능한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요르는 적잖이 놀랐다. 동생에게 편집적인 구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편지에 적힌 이야기는 지나치게 비틀리고 자학적이었다.
내가 정말 누나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요르는 거기까지 읽은 편지를 힘껏 쥐고 헛숨을 들이켰다. 동생의 엇나간 애정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주어야 할지 빠르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어떤 모습이 되었든 그녀는 여전히 동생을 사랑했다.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어야 했다. 유리는 그 자신이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은 사람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요르는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침대 위에 동생은 없었다. 대신 그가 입고 있던 빈 옷가지가 누워 있던 모습 그대로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