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시간 전이었다. 맞은편에 걸린 시계가 네 시 반을 가리켰다. 지금은 오전이던가, 오후던가. 타자기 앞에 앉은 젊은 국원의 피곤한 눈이 초침을 좇았다. 평소만큼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표류한 시간을 되짚었다. 콘크리트 벽이 사방을 둘러싼 이 건물 내에서는 낮과 밤을 가늠하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처음 여기 앉았을 때가 정오였으니 지금은 아마 늦은 오후다. 장장 네 시간이 넘도록 꼼짝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고개를 숙인 그가 마른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여태 제목조차 붙이지 못한 보고서에 단 한 글자도 적어 넣지 못했다. 손가락 사이로 넋이 나간 눈동자가 책상 끄트머리를 응시했다. 타자기 앞에 뿌리를 박은 듯 앉은 그는 오래도록 갈등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에 가까스로 깨닫게 된 사실을 그는 아직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이 버거운 기밀을 폭로한 후의 처분에 대해 생각했다. 근신? 정직? 파면? 어쩌면 근무 태만이라는 죄목으로 취조실에 끌려들어갈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반국가 활동을 단속하기 위해 견장을 단 비밀 경찰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사실 그 따위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그의 누나에 관한 일이다. 그는 이 앞으로 예정된 비극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었다. 한참을 더 생각에 잠겨 있던 피로한 눈꺼풀이 시야를 덮었다. 거짓말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꾸며 댈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무엇 하나 속이지 못하고 짧은 시간 안에 들통날 것들이었다.
네 시간 전이 되어서야 그는 타자기 위에 손끝을 얹었다. 느릿하게 자판을 건드리는 손가락이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낯익은 이름은 그의 매형의 것이었다. 다시금 움직임이 멎은 그의 잇새에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솔직히 그는 한순간도 그 남자를 매형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남매의 작은 세계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온 불청객이었다. 오롯한 반감과 맹목적인 질투가 그 남자를 향한 악의의 전부였다. 그는 차라리 그 작자가 그럴 듯하게 위장한 적국의 첩자이길 바라곤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는 남자의 가짜 이름을 맥없이 중얼거렸다. 건조하게 말라붙은 분노가 목구멍 아래까지 일렁였다.
그 남자의 또 다른 이름을 그는 몇 시간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그 발견이 그의 이성을 온종일 갉아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보안국에 소속된 이래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도 더 들어 왔을 이름이었다. 곱씹을 때마다 매섭게 옆으로 찢어지는 눈 아래 드리운 그늘이 그의 부드러운 인상을 한층 사납게 했다. 얼굴도 없이 짤막한 암호명만이 알려진 그 남자는 보안국의 오랜 숙적이었다. 머리가 영리한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옳은 답을 알지만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낡은 타자기 앞에서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는 동안 그의 사고회로는 한 가지 생각으로 수렴했다. 누나를 위한 건 어느 쪽이지?
세 시간 전이다. 힘이 빠진 어깨가 조금 더 수그러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에 반복되는 의문이 다시금 어른거렸다. 마침내 몸을 일으킨 그가 여백이 대부분인 종이를 잡아 찢었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굳어 있던 무릎에서 관절이 뚝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오답을 고르기로 했다. 보고서를 완성하는 대신 나무토막 같은 다리를 움직여 자료실을 나섰다. 눈이 시큰하도록 환한 복도에서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제복 차림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시점에서 이미 그는 희미하게나마 불운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떨어지는 해질녘이었다. 방향성을 잃어 목적의식만 남은 걸음이 한동안 거리를 헤매었다. 그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건널목 앞에 섰다. 인적이 잦아든 길가에는 이제 보는 눈이 없다. 더 멀리까지 걸을 필요도 없었다. 황혼을 등진 남자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린 사람 같았다. 신호등이 바뀌자 남자는 망설임 없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한곁같이 재수없는 말끔한 낯짝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이제 그가 알던 남자가 아니었다. 낯선 분위기를 느낀 것이 비단 그의 다른 얼굴을 알게 된 탓만은 아닐 것이다. 서늘함이 서린 푸른 눈동자가 맞은편에 선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두 시간을 앞두고 불현듯 그는 지난주의 일을 떠올렸다. 퇴근길에 새 꽃을 선물하고 싶어서 무작정 집을 찾은 날이었다. 성가신 조카는 학력평가가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돌아오는 주말에 쿠키를 구워 놓겠다던 상냥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 녀석 수학 숙제는 다 했을까? 그 조그마한 꼬맹이가 소매를 붙들고 귓가에 속닥거린 말이 떠올랐다. 삼촌, 아버지랑 싸우면 안 돼. 실없는 소리 말라고 쏘아붙였지만 다시 생각하면 참 감 좋은 꼬맹이였다. 마치 이 난폭한 밀회를 벌써 어디선가 지켜보고 온 녀석처럼. 매형이었던 남자를 노려보는 두 눈이 찬찬히 가늘어지며 날을 세웠다. 지키지 못하게 된 약속을 후회하기에 그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는 권총을 들어 상대의 눈썹 사이를 똑바로 겨누었다. 허울뿐이던 평화가 벗겨진 이상 결국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그가 타자기 앞에 앉아 내내 고민하던 일은 그런 것이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그는 고함을 질렀다. 분하게도 그는 누나를 위해 사라져야 할 것이 어느 쪽인지 알고 있었다. 보고서를 찢어 없애고 건물을 나선 순간부터 선택은 끝나 있었다. 결과가 뻔한 승부였다. 그는 한순간도 그 남자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매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누나를 위한 것은 정의였고 그렇지 못한 것은 없애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평범한 행복을 위협하는 것이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었을 뿐이다.
마지막 한 시간의 울분을 남자는 오롯이 받아 주었다. 죽일 듯 덤벼드는 처남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하고도 일말의 변명조차 않았다. 들키지나 말았어야 했다고 그가 원망스러운 울음을 토했다. 조용히 열린 입술이 묵묵한 사과를 건넸다. 어린 보안국원의 턱 아래 총구를 겨눈 손끝에서 엷은 망설임이 묻어났다. 남자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 역시 가장된 평화를 위해 사라져야 할 것이 어느 쪽인지 알고 있었다. 남자는 그가 눈 뒤집힌 불나방처럼 내닫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암묵적인 협박이었다. 눈감아 줄 테니 그녀의 일상을 허물어뜨릴 요소를 어서 죽여 없애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머뭇거림을 끝낸 남자가 순순히 방아쇠를 당겼다. 턱 아래서부터 정수리까지 꿰뚫린 얼굴이 마른 꽃잎처럼 터져 나갔다. 어렴풋한 고통에 젖은 푸른 눈동자가 숨이 꺼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남자는 두 사람분의 마음을 짊어져야 했다. 그는 아내에게 조만간 새 꽃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