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볕이 들지 않는 자리에 죽어 있었다.
닳아 부러진 손톱으로 흙바닥을 움킨 채 텅 빈 시선만을 위로 한 얼굴이 그늘 아래서 맥없이 이쪽을 응시했다. 눈길이 닿자 늦여름 더위에 반쯤 녹아내린 눈동자가 반가이 미소짓는다. 오래 기다렸어요? 수백 번을 그렸던 목소리가 꿈틀거리는 목구멍 밑에서 나직이 속삭이는 듯한 착각. 그녀는 홀린 것처럼 다가가 그 곁에 천천히 허물어졌다. 하염없이 흘려보낸 여름과 시야가 이지러드는 더위의 끝자락에서 연인의 초라한 마지막을 마주한다. 웃는 듯 보였던 마른 입꼬리를 쓸자 벌어진 입술 새로 날벌레가 들끓었다. 힘에 겨워 뱉은 옅은 숨결조차 머리 위를 뒤덮는 매미 울음소리에 묻혀 사그라들었을 어느 외로운 여름.
멎었던 시스템이 과열된 모터를 굴려 사고하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뒤섞이는 데이터가 원인을 특정하지 못한 불안감과 상실감 사이를 오갔다. 필멸하는 존재의 불합리에 대한 상심이련가. 엔진이 달군 듯 뜨겁고 회로가 울렁거려 잠시간 감각 정보를 차단한 기계는 가만히 손을 뻗어 차게 식은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닫힌 눈꺼풀에서 흘러나온 물기가 옷깃을 적실 즈음에야 답을 도출하지 못한 자리에 슬픔이라는 결과값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빛이 들지 않는 곳에 그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 그녀는 그림자 너머에서 시선을 느꼈다. 그늘 아래에 살다 그늘 아래서 숨을 다한 넋은 어둠이 내린 자리마다 반쯤 녹아내린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시선이 맞닿으면 그것은 반가이 미소짓는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인식한 정보를 불러오기 위해 메모리가 과부하되는 중에도 그녀는 그의 존재를 또렷이 느꼈다. 낯익은 미소 뒤의 형체 없는 악의로 덩어리진 사념이 낳은 괴리조차도.
당신은 그가 아닙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모습을 흉내내어 남겨진 자아 밑바닥의 잔여 데이터일 뿐이에요. 잡아먹을 듯 손을 뻗어 오는 망령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섬짓하도록 차가운 손끝이 뺨에 닿는 순간 인지 오류를 일으킨 데이터가 시야를 붉게 물들이며 에러 메시지를 띄웠다. 눈앞이 점멸하고 회로가 타들어가며 그녀는 전원이 나간 고물덩어리처럼 무너져내렸다. 어렴풋이 흩어지는 의식 사이로 낮고 지리멸렬한 그의 흐느낌이 흘러들었다.
그녀는 망자의 흔적에게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죽지 못하는 그녀에게는 끝끝내 닿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외로운가요? 거울 너머로 그녀는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죽음에게 물었다. 그것은 사선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미소지었다. 오롯한 의사소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다. 지성과 실체를 잃은 사념의 덩어리는 그저 출력되지 못한 재회의 인사를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해 재생했다. 반쯤 녹아내린 눈동자와 문드러져 바스라지는 입술을 하고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순간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녀는 어깨 뒤로 손을 뻗어 거울 너머의 그가 서 있을 공간을 어루만졌다. 서늘한 기운이 손가락 끝에 닿는 찰나 어김없이 시야가 점멸한다.
예로부터 유령은 기계가 가진 주파수에 섞여들어 장난을 즐긴다는 환담이 있던가. 멋대로 신호가 끊어지는 시스템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며 중추 회로를 흔들어 놓았다. 고장난 TV처럼 어지럽게 노이즈가 섞인 뇌내의 영사기가 함께 여름 축제를 보러 가자던 그의 열없는 고백을 투사했다. 제어 기능을 소실한 메모리에서 저장된 데이터와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가 뒤섞여 알아볼 수 없는 속도로 흘러나와 질주하고, 이윽고 본 적 없는 장면에서 천천히 멈추었다. 의식을 놓지 않기 위해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노을빛으로 물든 그의 목덜미 뒤로 아름답게 여름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낙하하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는 늘어난 테이프를 거꾸로 재생한 듯 두서가 없어 알아들을 수 없다. 저녁 하늘에서 흘러내린 불꽃이 남은 불씨가 타들어가는 폭죽 속으로 빨려들어가자 주위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그는 잡았던 손을 놓았고, 그녀는 뒷걸음질로 걸으며 축제의 열기로부터 멀어져 갔다. 뒤집혀 흘러가던 두 사람의 존재하지 않는 추억은 시간대를 거슬러 재회의 순간에 다시금 멈추어 선다. 텅 빈 시선으로 위를 응시하는 대신 그는 생기가 도는 입술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아껴 온 말이라는 듯 조심스레 속삭여 묻는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녀는 눈을 뜨고 거울 너머를 바라보았다. 섬짓하도록 차가운 두 손이 어깨 너머에서 스멀스멀 넘어와 느릿하게 뺨 위를 덮었다. 닳아 부러진 손톱이 시야를 메우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조용한 신음 끝에 작동을 멈춘 기계는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무너져 무릎부터 내려앉았다. 죽음은 만족스러운 듯 침전하여 그 위로 아물아물 바스라진다.
입력 신호가 없다는 안내음이 나직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