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글

바다의 노래

차흘 2020. 4. 28. 17:04

 

 변덕이 심하기로 새벽녘의 바다를 따라올 것이 있을까. 해군이라는 직업은, 어쩌면 바다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다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바닥만한 조각배에 몸을 실은 노련한 정찰병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는 이미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닥치는 파도 위에서 키를 붙든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감이 좋고 몸이 잽싸 정찰병이라는 직책을 얻은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스스로의 감을 지나치게 맹신한 모양이었다. 괜한 만용을 부렸나, 초저녁부터 공기가 눅눅한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굵어진 빗방울이 하얗게 질린 뺨이며 콧잔등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뒤늦은 후회 대신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돛대를 힘줄이 돋도록 부여잡았다. 수영이라면 제법 자신이 있었다. 해군이라는 이름표가 무색하지 않게끔 자부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새카만 물 속으로 몸을 던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바다가 그를 비웃듯 허공을 삼키며 입을 벌렸다. 광활한 바다 앞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 그저 흔들리는 배를 붙들고 간신히 발 붙여 서 있는 것이 전부였던 때, 솟아오른 암초를 들이받은 조각배가 고통스런 굉음을 질렀다.

 

 나무로 된 바닥이 두 동강 나며 처절하게 매달려 있던 몸뚱이가 물 속으로 미끄러졌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폭풍우 속에서 정찰병은 일렁이는 수면을 향해 팔을 뻗었다. 간신히 내민 얼굴이 채 숨통을 터뜨리기도 전에 파도가 그 위를 덮쳤다. 호흡을 잃어 허우적거리는 몸을 뒤덮은 바닷물이 기도로 밀려들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발버둥치던 허벅다리를 부서진 나무 파편이 깊게 베고 지나갔다. 허리 부근의 물살이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붉게 번졌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어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고통에 몸부림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가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발버둥쳤지만, 잔인한 바다는 그 미약한 노력에도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물 속에서 그는 시야가 흐릿하게 이지러드는 것을 느꼈다. 휘몰아치는 폭풍우와 내리치는 천둥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울렸다. 해군이라면 모름지기 바다 위에서 죽는 것이 영광 아니겠느냐는 누군가의 헛소리가 머리를 스쳐간 듯도 했다.

 

 힘이 빠진 팔다리에서 움직임이 잦아들고, 하염없이 가라앉으며 벌어진 입술에서 터진 마지막 숨이 위로 흩어질 때였다. 그는 까맣게 물들어가는 시야 한켠에서 기묘한 움직임을 보았다. 저 멀리 수면에서부터 다가오는 달빛을 등진 인영. 그것이 일렁이는 물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에 보는 헛것이겠거니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신비로운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것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가느다란 팔의 움직임과 곡선을 그리는 허리.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춤추듯 머리칼이 흩날리고, 금붕어의 것을 닮은 아름다운 지느러미가 물살을 갈랐다.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두운 바닷속에서 언뜻 그것의 눈이 빛난 것 같기도 했다. 미지의 것과 조우하는 순간은 어쩐지 두렵다기보다 아름다웠다. 다정한 손길이 어깨를 감싸안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정찰병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얼핏 정신을 차렸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꺼풀을 찔렀다. 눈을 채 뜨기도 전 허벅지에서 올라오는 뭉근한 고통에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겨우 눈동자를 굴려 내려다보면 베인 상처에 찢어진 천조각 같은 것이 묶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뒤늦은 상황 파악에 나선 두 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흠뻑 젖었던 몸이 너른 바위 위에 얹혀 있었다. 볕이 드는 표면을 매만지면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아직 나른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 가슴을 툭툭 치자 마른기침이 쏟아졌다. 소금기가 남은 호흡을 뱉어내고, 느리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낯선 인기척이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킬 만도 한데,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손끝 하나 까딱이지 못하고 호흡을 멈추었다. 한순간 넋을 잃었다는 쪽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홍옥을 닮은 산호빛의 눈동자. 가슴 아래까지 늘어뜨린 녹색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며 뺨을 스쳤다. 도자기처럼 희게 빛나는 피부는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했다. 허리 아래로는 오색으로 빛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투명한 비늘에 덮여 바닷물에 끄트머리를 담그고 있었다. 이쪽을 빤히 들여다보는 말간 얼굴은 차마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이 청아하다. 일평생 본 일이 없는 아름다움에 정찰병은 멍하니 맞닿은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어릴 적 읽은 동화 속의 인어 공주님인가.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붙어 있었다. 안심하라는 듯, 그녀가 가만히 미소지었다. 살짝 열린 붉은 입술 새로 가지런한 이가 반짝였다. 겨우 정신을 붙든 정찰병은 눈앞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연한 살갗을 찢고 물어뜯기에 적합한 뾰족한 송곳니. 길을 잃은 것들을 파멸로 이끄는 바다의 노래. 인간의 넋을 홀려 어두운 심해로 유인하는, 잔혹하고 아름다운 마물.

 아, 이것은 인어가 아니다.

 오래 전 세이렌에 관한 서적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듣는 이의 영혼을 앗아가는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종족. 그것들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암초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뱃사람들을 홀렸다. 넋을 잃은 이들의 배가 암초에 부딪혀 난파하면,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내 어리석은 인간을 잡아먹는 간악한 존재들이었다. 식은땀이 밴 손을 말아쥔 정찰병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껏 세이렌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걸쳐 전해졌지만 실제로 그것을 만나본 일이 있다는 증언은 없었다. 거꾸로 말하면 세이렌을 만나고 살아 돌아온 전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정찰병은 뉘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바위에 걸터앉은 그것을 마주 바라보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지만 이상하게 두렵지만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위에서 맞닿은 시선이 한참 서로를 바라보았다.

"날 잡아먹을 생각이에요?"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지금이라도 귀를 틀어막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면 달아날 수 있을까. 언뜻 그런 생각을 했지만,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마물은 도무지 해를 끼치려는 조짐이 없었다. 정찰병은 여차하면 뒤로 물러나려 바닥에 손을 짚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시선은 아직 앞을 향한 채였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세이렌은 소리없이 웃었다. 그녀는 뭐라고 답하려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곧 대답 대신 손가락을 뻗었다. 하얀 손가락의 끝이 그의 허벅다리를 가리켰다. 정찰병이 잠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 손가락과 천조각이 묶인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면, 세이렌은 두 손을 어깨 위로 가볍게 들어 보였다. 제 손으로 한 일이라는 의미를 담은 몸짓인지. 이내 그녀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려는 표정인 것만 같아서, 정찰병은 슬그머니 긴장이 풀려 허벅지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건 일부러?"

 조심스러운 물음이 이어졌다. 그녀가 목소리를 내는 찰나 넋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눈앞의 미지를 알지 못하는 만큼 막연한 불안이 담긴 질문이었다. 세이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빠끔거리는 입술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물 속의 물고기가 호흡하듯 느리게 움직이던 입술이 다시 다물리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목젖 위에 얹혔다. 그제야 정찰병은 그녀의 목 위에 가로로 길게 남은 흉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딘가에 베인 자국일까. 망가진 성대가 움직일 때마다 흉터가 진 살갗 아래의 목젖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정찰병은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목소리를 잃은 마물. 그가 만난 것은 노래할 수 없는 바다의 선율이었다.

 노래하지 못하는 세이렌이라니. 아가미를 잃은 물고기, 날개를 잃은 물새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어느 새 두려움이 가라앉은 그의 가슴 한켠에 어렴풋한 연민이 자리잡았다. 인간을 사냥할 수 없는 세이렌은 먹이로 삼기 위해 그를 건져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그라지는 생명을 향한 순수한 호의. 그게 아니라면 구태여 다친 상처를 치료해줄 이유도 없을 터였다. 폭풍우에 휘말려 잃어버린 모자를 벗어드는 대신 정찰병은 가슴 한가운데 정중히 손을 얹어 감사를 표했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인사를 받은 세이렌은 대답 대신 환하게 웃었다. 그 해사한 미소에 정찰병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존재가 정말 잔혹한 마물이라면 기꺼이 잡아먹혀도 좋지 않을까. 모르는 사이 벌써 이것에게 홀려버린 게 아닌지, 시답잖은 갈등을 하며 머뭇거리던 입술이 조심스레 스스로를 밝혔다.

"나는 야마자키라고 해요. 야마자키 사가루."

 그가 수줍은 듯 입에 담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비록 부를 일 없는 이름이겠지만 세이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릴없이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정찰병이 붉어진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름을 묻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그녀의 입술이 슬프게 호를 그렸다. 정찰병은 그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말을 멈추었다. 스스로의 이름조차 들려주지 못하는 바다의 마녀에게 그는 자신이 부를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특별하게 여기는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습성이었다.

"눈이 예쁘네요. 꼭 유리구슬 같아요."

 순박한 칭찬을 건넨 입매가 열없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타마……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구슬을 뜻하는 단어의 의미처럼, 유리구슬을 닮아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살풋 웃었다. 그가 붙여준 이름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곁에 머물렀다. 달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세이렌은 이따금 말없이 물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녀가 수면 위로 나올 즈음엔 손에 큼직한 물고기가 들려 있었다. 산 채로 퍼덕이는 그것을 받아들며 정찰병은 인간을 사냥하지 못하는 세이렌이 지금껏 어떤 식으로 연명해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다행히 그는 바다 내음이 익숙한 해군이었고, 비위가 약한 편도 아니었던 터라 그녀가 건넨 날것의 살점을 어렵지 않게 입에 넣었다. 그가 힘을 주어 가른 생선의 반 토막을 그녀에게 돌려주면 세이렌은 그것을 들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선홍빛이 도는 생살을 찢어 삼키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핏기가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살며시 얼굴을 내미는 마물에게 정찰병은 가만히 웃어 주었다. 난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그런 의미를 담은 미소였다. 지친 그가 바위 위에서 선잠이 들면 세이렌은 조심스레 그의 다친 허벅다리를 살폈다. 그녀는 인간의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마물에 비해 한없이 더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 같았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던 그가 바위 위에 간신히 두 다리를 딛을 수 있기까지 세이렌은 곁을 지켰다.

 그렇게 날이 세 번 이울었다. 동이 터오는 이른 새벽, 그녀는 두 손을 뻗어 그를 물 속으로 이끌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정찰병은 망설임 없이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의 양손을 아래서 맞잡은 세이렌은 수면을 향해 배를 보이고 부드럽게 유영했다. 채 낫지 않은 다리로 어렵사리 물살을 가르는 그가 아래로 가라앉지 않도록 밑에서 몸을 받쳐 주었다. 정찰병은 그녀가 자신을 뭍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정한 손길을 따라 물 속을 헤엄치다 보면 어느 순간 숨이 모자라게 되는 찰나가 있었다. 가볍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세이렌이 입술을 빠끔거리는 듯했다. 이내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그녀가 맞닿은 입술 새로 숨을 불어넣었다. 놀란 듯 움찔 흔들리던 눈동자가 곧 세이렌의 시선 끝을 좇았다. 수면에서 비스듬이 새어드는 햇빛을 정면으로 담은 산호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물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물이 점차 얕아지고, 아래서 몸을 받쳐주던 세이렌은 이제 그의 한쪽 손을 쥔 채 몸을 돌려 나란히 헤엄쳤다. 힘이 부친 그가 물살을 가르던 손을 멈추고 머뭇거리면 잠시 곁에서 기다려주기도 했다. 저 멀리 파도가 부서지는 방파제가 시야에 들어올 즈음, 그녀는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차 싶어 정찰병이 고개를 돌리면 세이렌은 더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별의 순간이 온 것을 안 그가 아쉬움을 담은 눈길로 입을 달싹이자 그녀는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남기고 싶었건만. 입을 열어 모자란 숨을 낭비하는 대신 어서 나아가라고 그녀는 눈짓으로 재촉했다. 말할 수 없는 스스로와 같이 말하지 않는 속내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 정찰병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애틋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세이렌은 화답하듯 미소를 짓고 한동안 이쪽을 돌아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깊은 바다로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정찰병은 다시금 힘을 내어 앞을 향해 헤엄쳤다.

 뭍에 닿은 손이 방파제의 끄트머리를 붙들었다. 팔에 힘이 빠져 한 차례 미끄러질 뻔했지만 침착하게 뻗은 반대편 손이 그 옆을 잡아 버티고, 튀어나온 곳에 발을 딛으며 힘겹게 방파제를 기어 올랐다. 저 멀리 해안을 순찰 중이던 동료의 익숙한 낯짝이 보였다. 죽음의 문턱으로부터 사흘만에 복귀한 정찰병은 남은 힘을 짜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잘못 들었나 싶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동료가 곧 방파제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린 손가락을 발견했다. 혼비백산해 달려온 그가 손을 뻗어 지친 몸을 위로 끌어당겨 주었다. 반질반질한 대머리에 덩치가 큰 동료는 유령이라도 보는 얼굴로 바닥에 늘어진 그의 팔이며 다리를 더듬었다.

"너 진짜 야마자키냐? 정말 살아서 돌아온 거야?"

"보면 알잖아.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어."

 힘이 풀린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선 정찰병이 대꾸했다. 휘청거리는 몸을 부축하며 동료는 반쯤 진심이 섞인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못 믿겠다. 네가 유령이 아니라면 제자리에서 세 번 돌고 왼발로 땅을 툭툭 차 봐."

"나 힘들어, 하라다……. 그런 거 할 기운 없다고. 명색이 해군이면서 쓸데없는 미신을 믿는 거야?"

"인마, 이건 해군이기 전에 뱃사람으로서의 의식이야. 괜히 유령한테 홀려서 재수 옴 붙고 싶지 않거든?"

 그야 그렇겠지. 정찰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제자리에서 도는 시늉을 했다. 바닥에 왼발을 두 번 구른 후에야 후들거리는 몸을 동료에게 기대었다.

"아, 지쳤다. 이제 정말 손가락도 까딱 못 하겠어. 기지까지 데려다 줘."

 동료의 단단한 팔뚝이 아직 절뚝거리는 걸음을 거들어 주었다. 네가 돌아가면 다들 기겁할 거라는 둥, 여차하면 장례식이라도 열릴 분위기였다는 둥 밀린 이야기를 수다스레 쏟아내는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어서 돌아가 쉬고 싶을 뿐인 정찰병은 그것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적당히 대꾸해주었다. 동료는 그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물었지만 바다 위에서 보낸 지난 사흘이 믿을 수 없이 꿈결 같은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기지를 향해 걷는 두 사람의 인영이 해변을 가로질렀다. 그 모습을 저 멀리 앝은 바닷가의 암초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세이렌은, 두 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진 뒤에야 안심한 듯 물 속으로 사라졌다.

 기지로 복귀한 정찰병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폭풍우가 사납게 몰아치던 새벽 조각배를 몰고 나갔던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기지가 발칵 뒤집혔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깨어난 그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놀라운 생존기를 보고 받기 위한 상부의 호출이 내려왔다. 피로가 덜 풀린 얼굴로 말끔하게 제복을 차려 입은 그는 기지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령관의 집무실을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말단 군인으로서 한 차례도 대면한 일이 없었던 고위 간부와의 독대에 괜히 양 어깨가 위축되는 듯했다. 옷매무새를 한 번 가다듬은 그가 문턱에서 반듯한 경례를 붙였다.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진 후에야 뻣뻣하게 굳은 걸음걸이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딱딱한 공기만큼이나 방 안은 고요하고 깔끔했다. 어리숙하게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바닷가가 내다보이는 창가를 흘끔 곁눈질했다. 권위적인 분위기의 사령관은 빳빳한 콧수염을 매만지며 예리한 시선으로 정찰병을 훑어보았다. 이내 근엄한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정찰을 나간 것은 정확히 몇 시경이었는지, 기지에 복귀하지 못한 사흘간은 어디에 있었는지 따위의 질문에 그는 착실히 대답했다.

"풍랑이 심했을 텐데. 배가 난파한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그…… 정신을 차려 보니 암초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누워 있었다니, 자네가 올라간 것이 아니고?"

"예, 실은 근처에 머물던 세이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세이렌……?"

 의외의 이야기에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쏘아보았다. 열중쉬어 자세로 질문에 답하던 정찰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노랫소리로 인간을 홀려 잡아먹는 사악한 마물이 아닌가?"

 재차 확인하듯 날이 선 물음이 이어졌다. 세이렌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은 분명 마물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그의 증언을 부정하고 있었다. 지금껏 세이렌을 만나고 살아서 돌아온 이는 없었다. 사령관의 강단 있는 목소리가 호령했다.

"정찰병. 자네는 지금 상관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는 건가?"

"그, 그렇지 않습니다."

 황급히 부정하는 음성이 가볍게 떨렸다. 당사자조차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는 차분하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세이렌은 성대를 다쳐 말을 할 수 없는 개체였습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해 인간을 홀리거나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냉철한 사령관은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그런가. 짤막하게 답한 그가 한동안 깍지 낀 손을 괴고 있던 책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절도 있는 군인의 걸음걸이로 다가온 그가 여전히 등을 꼿꼿이 펴고 서 있는 정찰병의 바로 옆에 멈추어 섰다.

"사실이라면 연구 자료로서 상당히 가치가 있겠군."

 툭 던지듯 내뱉은 말에 정찰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틀 뒤 특수부대로 구성된 수색대를 파견하겠다. 자네는 참고인 자격으로 승선하도록."

 말을 마친 그가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흔들리는 눈으로 제 발치를 바라보고 있던 정찰병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님, 재고해 주십시오."

 믿을 수 없다는 듯 상관을 회유하려는 얼굴이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두어 걸음 다가온 그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개체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주요 기관에 하자가 있어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척 봐도 겁 먹은 낯으로 반박을 늘어놓는 말단 정찰병의 되바라진 혈기에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정찰병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방 안을 크게 울리는 마찰음, 한 박자 늦게 왼쪽 뺨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그는 신음을 입 안으로 삼키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부하의 따귀를 갈긴 사령관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어조가 건방진 아랫것의 위치를 자각시켰다.

"이건 명령이다. 자네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정찰병은 군인답지 않게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눈물을 참는 그의 귓가에 냉정한 한 마디가 내리꽂혔다.

"이만 물러가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령관은 집무실을 비웠다. 그 자리에 한참을 못 박힌 듯 서 있던 정찰병은 관자놀이에 뜨겁게 피가 몰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하게 부어오른 것 따위는 이미 사고를 벗어나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제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세이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신을 잃는 찰나 물 속에서 뻗어오던 다정한 손길, 이쪽을 내려다보던 희고 말간 얼굴과 물결을 따라 흔들리던 녹빛의 머리칼을 떠올렸다. 뭍을 향해 헤엄치며 제게 숨을 불어넣어 주었던 부드러운 입술을 생각했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이라곤 나약한 먹잇감을 송곳니로 물어뜯는 대신 선의를 베푼 것뿐인데. 바다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듯한 자유로운 존재가 인간의 탐욕스러운 눈에 들어 이제는 먹잇감으로 노려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숨이 끊어졌더라면. 가슴을 죄는 자책감으로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에 그는 두 눈을 눌러 감았다.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이틀이 흘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의 심정으로 수색선에 오른 정찰병은 단 한 마디도 거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 속으로는 부디 그녀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지 않길 바랐다. 이 넓고 아득한 바다에 그 자그마한 몸을 감출 장소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위치를 묻는 질문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방향을 묻는 질문에도 정신이 없어 잊었다고 에둘러 대답을 회피하던 그가 부서진 조각배의 잔해가 남은 정찰지 인근에서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사령관의 호령 한 마디에 훈련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의 몸을 붙들었다. 손쓸 새도 없이 갑판 위에 무릎이 꿇리고 양팔이 뒤로 꺾였다.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휘둘러보는 그의 손목에 돛을 당기는 데 쓰는 굵은 밧줄이 묶였다.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

 사령관의 냉정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제야 정찰병은 구태여 수색선에 자신을 태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뒷걸음질치는 몸이 파도가 몰아치는 갑판 끄트머리로 밀려났다. 이 해역은 그녀의 영역이었다. 고작 스무 명 남짓의 수색대가 그녀를 찾아내는 것보다 물 속에 가라앉아 허우적대는 자신을 그녀가 찾아내는 쪽이 빠를 터였다. 처절한 발버둥이 무색하게 손짓 한 번으로 중심을 잃은 몸이 갑판 아래로 떨어졌다. 교활한 상관의 무심한 질책이 귓가를 맴돌았다.

"정찰병. 자네는 군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사적인 감정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어."

 머리부터 고꾸라져 추락한 몸뚱이를 바닷물이 덮쳤다. 코와 입을 가릴 것 없이 차가운 물이 밀려들었다. 정신없이 몸부림하는 시야에 거품이 하얗게 부서졌다. 정찰병은 묶인 손목을 뒤틀고 발악하며 물 속에서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수영에는 제법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광활한 바다 앞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번개가 내리치던 공포스러운 기억이 점멸하는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처절한 발버둥에 흩뿌려지는 기포가 반짝였다. 그날의 새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잔잔한 바다, 가라앉는 중에도 수면에서 비스듬히 비쳐 들어오는 햇살. 그러나 정찰병은 오늘만큼 바다가 두려운 적이 없었다. 속절없이 뒤로 묶인 손목이, 내질러도 닿지 않는 비명이, 무엇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는 나약함이 통나무 같은 사지를 한없이 가라앉혔다. 물 속에서 그는 울었다. 저 멀리 수면에서부터 빛을 등지고 헤엄쳐 오는 부드러운 인영이 있었다. 그날처럼 이쪽을 향해 뻗은 다정한 손길이 어깨를 끌어안고, 물결을 따라 흩어지는 녹빛 머리칼이 뺨을 스칠 때에도 그는 울부짖듯 다가오지 말라고 목청껏 외쳤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을 즈음엔 이미 수면 위로 건져진 후였다. 그의 몸은 그때처럼 볕이 드는 바위 위에 뉘여 있었다. 눈이 뜨이자마자 그는 잔기침과 함께 마신 물을 토해냈다. 눈물이 배어나올 만큼 딸꾹거리며 모자랐던 숨을 들이키면, 머리맡에서 아름다운 세이렌이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떻게 된 일로?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이 발갛게 밧줄 자국이 남은 손목을 어루만진다. 아, 당신은 나를 두 번이나 구해 주었는데. 정찰병은 울컥 분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억누르고 그 손을 맞잡았다. 수면 아래서 비명을 지르느라 반쯤 쉰 목소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앞뒤 맥락 없이 다그치는 말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정찰병의 불안한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고, 덜덜 떠는 양손이 목소리 없는 세이렌의 어깨를 붙들었다.

"난 괜찮으니까, 빨리 달아나요. 어서요."

 자세한 건 설명하기 힘들다는 문장이 채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날아온 무언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찰나의 순간 날카로운 작살이 세이렌의 왼쪽 옆구리를 꿰뚫었다. 빠끔거리는 입술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정찰병은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입술 새로도 단말마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물에 젖은 셔츠 자락에 세이렌이 흘린 핏자국이 번져 붉게 물들었다. 곧 뭍으로 건져올린 물고기처럼 그녀의 몸이 힘없이 공중으로 딸려 올라갔다. 비늘 조각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지느러미가 애처롭게 퍼덕였다. 생포했다, 그런 외침이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미끼가 된 정찰병은 그저 볕이 드는 암초 위에 맨발로 꿇어앉은 채 서럽게 울었다.

 숙소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지친 몸을 끌다시피 침대에 뉘인 정찰병은 베개에 코끝을 박고 얼굴을 묻었다. 허리께에서 선득한 피를 흘리며 고통스레 일그러지던 고운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구슬 같은 눈망울에서 흩어지던 눈물이 여전히 눈앞에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는 하얀 시트가 구겨지도록 주먹을 그러쥐고 흐느낌을 삼켰다. 흠뻑 젖었던 몸이 분노와 자책으로 으슬으슬 떨렸다. 지금껏 나라의 공익을 위해 일한다고 여겼던 군인이라는 직업에 구역질 날 만큼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는 열감기를 핑계로 병가를 냈다. 며칠이 지나도록 숙소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열병이 났다는 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신체적, 정신적으로 쌓여 온 부담은 건강하던 30대 초반의 청년을 쓰러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밤마다 열이 끓어오르는 몸뚱이를 부여잡고 앓았다. 앓다가 지쳐 선잠이 들면 바다의 꿈을 꾸곤 했다. 빛을 등지고 일렁이는 물 속을 유영하는 아름다운 세이렌. 그녀는 수면에서부터 부드럽게 헤엄쳐 그에게 다가오곤 했다. 그리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속삭여 불렀다. 노래하듯 귓가에 감겨 오는 꿈결의 속삭임은 그의 영혼을 홀리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달이 밝은 어느 새벽, 그는 얇은 셔츠 바람으로 숙소를 빠져나왔다. 보름달이 뜨는 밤은 마물의 요기가 짙어진다는 미신을 들은 일이 있었다. 뱃사람답지 않게 그는 그다지 미신을 신봉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맨발로 홀린 듯 마룻바닥을 밟는 걸음은 이미 바다의 노래에 넋을 빼앗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다. 노련한 정찰병이 기지 밑바닥의 밀실까지 소리 없이 숨어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에 놓인 거대한 수조 앞에서 그는 발을 멈추었다. 창가에서 비스듬이 새어드는 달빛을 머금은 수조의 물이 일렁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안에 있던 것이 느릿하게 감은 눈을 떴다. 유리구슬을 닮은 산호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했다. 정찰병이 열이 오른 얼굴을 수조의 유리벽에 기대면 그것은 서서히 그 앞으로 헤엄쳐 왔다. 고요한 수조 속에서 빠끔거리는 입술이 수족관의 물고기가 호흡하는 것 같았다. 정찰병은 눈을 감고 나직한 날숨을 쉬었다. 하얀 손가락이 유리 너머로 그의 수척해진 뺨을 쓸어주었다. 등허리의 상처는 이미 깨끗하게 나은 모양이었다. 과연 마물의 회복력은 인간과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정찰병은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에 마른 입술을 꾹 물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자신이 붙인 이름을 불렀다.

"타마 씨."

 유리벽을 사이에 둔 그 부름을 알아들었는지, 붉은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는 한참 입 안에서 갈 곳을 헤매던 혀를 움직여 물었다.

"인어 공주라는 동화 알아요?"

 세이렌은 잠자코 그 중얼거림을 듣고 있었다.

"그 이야기에는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가진 아름다운 공주님이 나와요. 꼭 당신처럼요."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려 말간 얼굴을 가만히 마주보았다.

"목소리를 잃은 것도 당신과 꼭 닮았네요."

 맥없이 속삭이는 입술이 희미하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있잖아요. 당신은 인어가 아니고, 나도 왕자가 아니지만……."

 정찰병은 발치에 떨어져 있던 부서진 벽돌 조각을 집어들었다. 수조 너머를 한참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슬퍼 보이는 눈가를 유리 너머로 천천히 쓸어주었다. 일렁이는 물 속에서 느릿하게 깜박이는 그 눈이 눈물을 흘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난 당신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짧은 심호흡.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과 함께 그가 손에 쥔 뾰족한 벽돌 조각을 힘껏 수조의 유리벽을 향해 휘둘렀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이 닫힌 공간을 울렸다.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 입술을 빠끔거려도 개의치 않고 그는 몇 차례나 유리를 내리쳤다. 상처가 난 손이 찢어져 피가 맺혀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금이 간 유리벽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벽돌 조각을 집어 던지고, 구멍 난 방파제처럼 터져나온 물살에 섞여 미끄러져 나온 세이렌을 그는 젖은 품 안에 소중히 안아 들었다. 밑바닥에서 퍼져 나간 소음이 새벽의 잠을 깨웠다. 여기저기서 달려나온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그는 다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안심해도 돼요."

 그와 동시에 물에 젖은 맨 발바닥이 깨진 유리 위를 박찼다. 핏자국을 남긴 발자취가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 속을 가르는 날짐승처럼 잽싸게 계단을 오르고, 건물을 빠져나와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을 향해 숨이 턱 아래 닿도록 뛰었다. 품에 안긴 세이렌은 그의 다부진 팔뚝에 몸을 맡기고 단단한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 뒤를 집요하게 쫓는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고함치는 소리, 달음박질 소리, 겁이 나는지 눈을 질끈 감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목소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내가 정찰병이 된 이유는요. 이 근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다리가 빠르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허세를 부리는 몸은 점차 힘이 부치기 시작한 듯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간신히 방파제 앞에 도착한 그가 그 끄트머리에 후들거리는 무릎을 굽혀 꿇어앉고, 품에 끌어안고 있던 몸을 물 속에 놓아주었다. 목덜미에 감겨 있던 두 팔이 미끄러지듯 바닷물에 잠겼다. 등 뒤에서 따라붙는 추격이 가까워지기 전에, 그 손끝을 스치듯 쥐었다 놓아주며 그는 안타까운 듯 외쳤다.

"어서 가요. 멀리 헤엄쳐 가요. 이 해안가에 다시 돌아오지 말아요."

 그녀가 말할 수 없는 입술을 벌려 무어라 달싹이자, 그는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입을 열어 모자란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어서 나아가라고 그는 눈짓으로 재촉했다. 아름다운 세이렌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정찰병은 이별의 순간에 그러했듯, 애틋한 얼굴로 다시금 웃어 보였다.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지느러미가 물살을 갈랐다. 하얗고 커다란 달빛이 수면 위에 둥글게 일렁였다. 수면 아래의 움직임이 깊은 바다로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정찰병은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헤엄치던 세이렌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을 만큼 물이 깊어졌을 즈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주저앉듯 꿇어앉아 있는 자그마한 인영을 둘러싼 인간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조급한 몸짓으로 사방을 향해 무어라 떠드는 듯했다. 곧 주저앉은 몸을 붙든 팔들이 그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이유 없이 몰려오는 불안감에 세이렌은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해변을 가로지르는 인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죄인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후회하지 않았다. 해군의 지위를 박탈당한 그는 더 이상 정찰병이 아니었다. 국가의 귀중한 기밀 연구 자료에 사적으로 손을 대 분실한 것이 교수대에 선 남자의 죄목이었다. 피어오른 물안개가 하늘을 덮은 어느 새벽, 거적을 덮어쓴 얼굴에 밧줄에 매였다. 미약한 몸부림이 잦아들고 마침내 숨이 꺼질 때까지 그는 한 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독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가 그야말로 군인다웠다. 누군가는 그가 틀림없이 바다의 노래에 넋을 빼앗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체는 자루에 담겨 인근 바다에 수장되었다. 광활한 바다 앞의 나약한 인간은 이제 숨이 사그라진 채 하염없이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시간이 흘러 방파제의 끄트머리가 조금 더 바스라지고 뭍의 인간들이 그곳에 감이 좋고 몸이 잽싼 정찰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갈 때쯤, 어느 먼 바다에서 목덜미에 가로로 긴 흉터를 가진 세이렌은 자신과 같은 위치에 붉게 밧줄 자국이 남은 누군가의 시체를 끌어안고 한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일렁이는 물 속에서 느릿하게 깜박이는 산호빛 눈동자가 눈물을 흘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호흡을 멈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직이 숨을 불어넣었다. 그것이 눈을 뜨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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