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글

19N4

차흘 2023. 12. 18. 23:04

 
 그것은 세상이 천천히 멈추는 꿈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 한 시를 가리킨 채 멈춰 있는 바늘을 눈치챈 것은 그녀뿐인 것 같았다. 봄비를 맞아 떨어지던 나뭇잎은 허공에 걸려 더 움직이지 않았다. 느릿하게 흘러가던 구름도 흐린 하늘에 조용히 고여 있었다. 길고 지루한 한낮의 어느 순간, 세상은 소리 없이 멈춰 버렸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재앙이었다.

 꿈속의 그녀는 청사 뒤편의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소름끼치는 정적 속에서 문득 젖은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멈춘 시계탑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뒤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다가오던 그는 머리 위에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세상은 멈추었으나 등 뒤의 남자는 아직도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어쩐지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목 뒤에서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잠자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리가 방아쇠를 당기기를 기다렸다.

 그녀를 깨운 것은 맹렬한 통증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스름한 새벽녘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가 이따금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몽롱한 시선으로 물그림자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이내 긴 숨을 내쉬었다. 평소 일어나던 때에 비하면 아직 한참은 이른 시각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다시 눈을 붙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불쾌감이 피부를 찔렀다. 건조한 악몽이었다. 총알이 꿰뚫고 지나간 자리에 여전히 뭉근한 환통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뒷목을 쓸자 마른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거렸다. 입 안으로 흘러드는 물이 현실을 헤매는 정신을 조금 더 또렷하게 했다. 무의식 속에서조차 그녀는 그가 자신의 머리를 겨눌 것을 믿고 있었다. 근거 없이 막연한 예감이었다.

 4월의 아침은 맑고 쌀쌀했다. 새벽 내내 내리던 비가 겨우 그친 공기에 아직 물 냄새가 배어 있었다. 평소보다 이르게 집을 나선 클로에는 고개를 들어 베를린트 광장 쪽을 바라보았다. 두 블럭 떨어진 거리에서도 보일 만큼 높다란 시계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도 시계탑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상의 어떤 것들도 도시를 내려다보는 저것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닮은 시계가 거대한 바늘을 쉼 없이 움직였다. 네모진 탑의 모든 겉면에 붙은 건조한 눈동자들이 그녀를 응시했다. 이 나라에서는 생명이 없는 것들마저도 시민을 항한 감시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시선이 묘하게도 보안국의 엠블럼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청사 앞에는 이른 시간부터 인파가 바삐 오가고 있었다. 클로에는 잠시 멈추어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가방을 고쳐 멘 그녀가 막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찰나였다. 문앞에서 익숙한 손길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간밤의 불쾌한 꿈이 머리를 스쳤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얼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날카로운 반응에 유리는 꽤 멋쩍어 보였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입술만 조금 삐죽이고 마는 정도였다. 짧게 사과를 건넨 그가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볼멘소리를 덧붙였다.

"내가 인사하는 게 그렇게 질겁할 일이야?"

"아뇨. 좋은 아침이네요, 소위님."

 클로에는 덩달아 싱거워진 표정을 풀고 살짝 웃어 주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그가 먼저 알은체하는 일이 흔치는 않았다. 물론 그녀가 놀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지만, 간밤에 네가 총구를 들이미는 꿈을 꾼 탓이라고 차마 정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유리는 그녀의 목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흘려 넘겼다. 곧 별다른 대꾸 없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꼴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클로에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사실 유리는 반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오히려 국가의 인재상에 완벽히 부합하는 쪽에 가까웠다. 국가를 사랑하는 그는 매사에 고지식했으며 질릴 만큼 융통성이 없었다. 체제를 좀먹는 이들을 누구보다 증오했고, 그런 것을 청소하는 일에 더없이 열성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보안국원으로서의 신분은 잘 어울리는 천직임이 틀림없었다. 클로에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언젠가 그가 국가를 배신하는 날이 올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사랑이라기보다 눈먼 신앙에 가까운 그의 맹목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었다. 그를 구성하는 모든 논리는 단 하나의 이유에서 비롯하며, 반드시 한 곳으로 수렴한다.

 그 단순한 사고 체계는 언뜻 모순된 구석이 없어 보이곤 했다. 유리 브라이어는 하나뿐인 가족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가족을 사랑하기에 가족이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사랑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공교로운 우연에 불과했다. 국가는 우연히 그곳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클로에는 단 하나의 예외가 저울 반대편에 놓이는 순간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유리가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는지는 그녀로서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언젠가 보안국을 배신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거북한 믿음이었다. 그는 언젠가 단 한 사람을 위해 나라를, 동료들을,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눌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오스타니아가 아니다. 그렇기에 오스타니아는 그를 원하지 않는다.

 벽에 걸린 보안국의 엠블럼이 커다란 사백안을 뜬 채 그녀를 기분 나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조용히 고개를 돌린 클로에는 로커 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국가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시선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지가 힘이 되는 시대에는 사상조차 죄가 되었다. 국가를 오롯이 사랑하지 않은 이들은 어느 날 증발하듯 사라진다.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그녀는 어깨 곁을 스쳐 지나간 남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날을 상상해 보았다. 그건 꽤 허무한 일이었다.

 오전은 변함없이 바쁘게 지나갔다. 느지막한 점심 시간대가 가까워지자 대부분의 직원들은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사무실에는 어느덧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클로에는 낡은 사무용 의자 뒤에 비스듬히 선 채 점심 대용으로 가져온 도넛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늘의 내근 파트너가 그 앞에서 꼿꼿한 자세로 타자기를 두들기는 중이었다. 하얀 설탕가루가 뿌옇게 흐려지는 오후의 빛줄기를 타고 춤추듯 흩날렸다. 길고 지루한 한낮의 어떤 순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청사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는 시계탑이 12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대한 쇳덩어리의 바늘이 한 칸을 움직인다. 열 세 번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시계탑의 묵직한 시선을 마주한 이가 자신뿐만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타자기 위에서 움직이던 손을 멈춘 유리가 함께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꿈속의 일이 떠올랐다. 13시에 멈춘 세계의 풍경이 아물아물 뇌리에 스며들었다. 클로에는 그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충동이 들었다. 먹먹한 종소리가 사무실 안에 쉼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넌 언젠가 국가를 배신할 거야, 유리."

 시계탑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살쾡이의 것을 닮은 날카로운 두 눈이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단언에 유리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뭐야?"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마지막 종을 울린 시계탑이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클로에는 입가에 가져간 도넛의 마지막 한 입을 잠자코 오물거렸다.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유리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한참이나 그녀를 올려다보던 눈이 사납게 가늘어졌다.

"처형해 버린다, 너."

 클로에는 대답 대신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그쪽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린 유리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야? 그런 농담 하나도 재미 없어."

"농담하려던 생각 없었어요. 진심으로 한 소리니까."

 짧게 대꾸한 클로에는 이내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설명한들 이해하지도 못할 상대에게 그 이상의 친절을 베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직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유리가 언짢은 듯 미간을 좁혔다. 종이 울리는 순간, 그 역시 어떤 날의 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천천히 가라앉는 꿈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녹아 흘러내리기 시작한 도시에는 시계탑의 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다정한 세계라고 굳게 믿었던 도시는 더이상 그가 알던 공간이 아니었다. 기이한 형태로 무너지는 도시로부터 그는 공포스러운 이질감을 느꼈다. 낯익은 하늘, 낯익은 거리, 낯익은 건물들이 점액질의 젤리처럼 내려앉아 느릿하게 발목에 감겨 왔다. 그 순간에도 베를린트 한복판의 시계탑만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중에도 그 견고한 시선은 종말까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채근하듯 울리는 종소리가 온 도시에 먹먹하게 진동했다.

 가라앉는 세계에서 유리는 이유도 모른 채 내달렸다. 도망치는 중에도 그는 당연한 듯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부르짖는 외침이 쉼 없이 울리는 시계탑의 종소리에 묻혀 사그라들었다. 천천히 매몰되는 텅 빈 도시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는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 하늘과 만나 있는 시계탑 꼭대기에 시야가 닿았다. 가장 높은 곳, 시계탑의 눈동자가 닿지 않는 유일한 곳에 단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녹아내리는 세계의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유리는 잔해를 아무렇게나 짓밟고 그곳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무자비하게 내려앉는 세상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켜 버릴 것 같았다. 경고하듯 귓전을 때리는 종소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기이한 세계는 더이상 그녀에게 상냥하지 않았다. 그런 세계 따위를 경애할 이유는 없다. 외려 영원히 가라앉아 버려도 좋다.

 배신자.

 무너진 발밑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아니, 누나를 위한 모든 것이 정의야. 그는 개의치 않고 쏘아붙였다. 나직한 비난은 이내 도시와 함께 스르륵 녹아내렸다. 그는 시계탑의 건조한 눈동자 위로 망설임 없이 덤벼들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도시의 잔해가 발목을 휘감았다. 수몰하듯 넘실거리는 도시가 가쁜 숨을 틀어막았다. 형체 없이 가라앉는 세계에 완전히 삼켜지기 전에, 그는 손끝을 뻗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더없이 사랑하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기묘한 꿈은 그 시선이 맞닿는 순간에 끝났다. 유리는 입술을 다물고 있는 클로에의 옆얼굴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발밑에서 그를 붙들던 속삭임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런 날이 오면 넌 나를 밀고할 생각이야?"

 클로에는 잠시 망설이다가 흘긋 눈길을 옮겼다. 기세가 한풀 꺾인 유리가 물끄러미 그 시선 끝을 좇았다. 그녀의 담담한 원망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 맥없는 낯짝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쩐지 이유 모를 연민이 피어올랐다. 내심 한 번쯤은 그가 부정하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클로에는 그 오만한 남자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일을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유리 브라이어는 대학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지독하게 단순했다. 그 법칙을 구성하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국가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뇨. 눈감아 줄게요."

 유리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할 일을 마친 타자기를 책상 안쪽으로 밀어 둔 그가 내뱉듯 중얼거렸다.

"대체 나랑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당신한테 배신당하면 기분이 꽤 별로일 것 같아서요."

 클로에는 눈썹을 찌푸리는 유리를 장난스레 노려봐 주었다. 이내 그녀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남자를 생각하면 슬며시 짜증이 밀려왔다. 어쩌면 국가가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닌지도 몰랐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 중 누구도 다시는 그날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가증스럽게도 그가 직업을 그만두는 일은 없었다. 태연히 애국심을 연기하는 그는 빈틈없이 오만했다. 클로에는 언젠가 자신이 최후의 목격자가 될 순간을 묵묵히 기다렸다. 종종 그녀는 그가 마침내 국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날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공범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목 아래가 아득하게 메였다. 국가를 사랑하지 않은 이들의 끝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날이 되도록 천천히 다가오기를 바랐다. 그 변변찮은 연민이 사그라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장마가 지나가는 늦여름이었다. 고요한 길거리에 황혼녘의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 깔린 감시망이 오랜 천적의 숨통을 소리 없이 조이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망설임 없이 하수관으로 뛰어내렸다. 그럴싸한 평화를 가장한 이 도시는 여전히 냉전의 최전선에 있었다. 개미굴 같은 감시의 선에는 이따금 사소하고 치명적인 것들이 걸려들었다. 정각을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지상에서 장송곡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범람한 빗물이 하수도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흘렀다. 물길을 따라 움직이며 그녀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소집 때 아주 잠깐 마주친 유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표정이 비쳤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난데없이 왜 그 눈빛이 떠올랐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세찬 물소리의 반향에 이질적인 소음이 간간이 섞여들었다. 여차하면 놓쳤을 그 희미한 울림은 사냥당한 짐승이 그르렁대는 숨소리를 닮았다. 클로에는 배관 뒤에서 가만히 숨을 죽였다.
 
 어린 상관은 모퉁이 어귀에 죽은 듯 고여 있었다. 변수가 없다면 그는 이미 한참 이전에 이 장소를 떠났어야 했다. 데인 사람처럼 멈춰 선 클로에가 잠깐 멍한 얼굴을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이곳에 멈춰 있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인기척을 느낀 듯 유리가 다시금 낮게 시근거렸다. 그녀는 잠들 것처럼 고개를 떨군 그의 옷깃을 덥석 잡아 쥐었다. 손 안쪽에서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났다. 창백한 뺨 아래 손등을 대어 보면 박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힘껏 뺨을 내리친 그녀가 카랑카랑하게 이름을 고함쳐 불렀다. 떴는지 감겼는지 모를 눈꺼풀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손으로 잡아 벌리면 또렷한 동공 대신 흰자위를 치뜬 눈이 허공을 향했다. 평소의 억센 맷집을 감안하더라도 우습게 여길 중상은 아닌 것 같았다. 품 안에서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클로에는 핏물과 먼지가 엉긴 옷자락을 젖혔다. 왼쪽 가슴께를 깨끗하게 관통한 상흔이 눈에 들어왔다.
 
"… 너 바보니?"
 
 얼굴을 일그러뜨린 클로에가 윽박지르듯 물었다. 매섭게 다그치는 투에 물기가 서렸다. 유리가 미약한 힘으로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태 의식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숨이 질기기는 한 모양이었다. 신경전이라도 하듯 손목을 붙든 그가 툭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힘을 잃은 목덜미가 맥없이 흔들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총에 맞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고 우길 셈인가. 평소에도 직관을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는 성격을 생각하면 납득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의 감은 날카로웠다. 살쾡이를 닮은 두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잦아드는 숨을 손끝으로 느끼며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런 날이 오는 순간을 몇 번이나 머리에 그려 보곤 했었다. 찰나의 선명한 배신감이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어느덧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된 주위가 천천히 멈추었다.
 
 문득 목덜미에 뜨거운 환통이 느껴졌다.
 
 입술을 달싹인 유리가 무언가 중얼거렸다. 클로에는 상체를 숙여 그 희미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바스라진 소리의 조각들이 사과에 가까운 단어를 만들었다. 그녀는 잠자코 입술을 다물었다. 오늘만큼은 상대를 착각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손길을 밀어낸 순간부터 그것만큼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아랑곳없이 옷자락을 당겨 체온을 잃어 가는 몸을 품에 안았다. 모른 척 누나를 찾는 그 영악함에 장단을 맞춰 한 번쯤은 가족의 흉내를 내 줄 수도 있었다. 허리께를 끌어안은 손이 그의 허리 뒤쪽에 꽂혀 있던 것을 찾아 쥐었다.
 
 그는 영리했지만 가끔 이렇게 어설픈 데가 있었다. 이를 테면 빼 들었던 시늉조차 하지 않은 허리춤의 권총 같은 것들이 그랬다. 마음이 앞서 상대와 맞붙었다는 연기를 하는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경험이 적은 탓인지, 물리기보다 무는 쪽에 익숙한 탓인지 그는 거짓말에 영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서툰 눈속임에 속아 줄 공범을 만든다. 괘씸하게도 꼭 이 자리를 골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꺼이 눈감아 주겠다던 그 한 마디를 믿고서. 그녀는 미련한 후배가 품 안에서 어깨를 떠는 것을 가만 내버려 두었다. 그의 세계는 이곳에서 완전히 녹아내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슬프게 만들 세계를 그는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손에 쥔 권총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그러나 망설이던 손길은 곧 힘없이 총구를 거두었다. 총성이 울리면 덜미를 잡힐 것이다. 몸을 일으킨 클로에는 반역의 마지막 증거물을 하수구 아래로 내던져 버렸다. 대신 그의 두 눈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야 이런 날이 오면 눈감아 주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녀 역시 이 오만한 반역자의 공범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던 탓이다.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는 하수도에는 시계탑의 삼엄한 시선조차 닿지 않았다. 유일한 목격자가 될 사람은 그녀뿐이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리가 슬며시 입꼬리를 당긴 것 같았다. 애당초 그는 보안경찰 따위와 어울리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눈을 감겨 주며 클로에는 그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배신자.

 목 아래가 메이는 기분은 예상했던 만큼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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