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보기 그는 쉬이 잊혀진다. 숨이 붙은 것들이 으레 가진 옅은 인기척조차 가볍게 죽일 수 있었다. 그는 낙엽 위를 소리 없이 걸었고 그늘 아래 고요히 녹아들었다. 길가에서 스친 그 흐릿한 얼굴을 한나절 이상 기억하기란 수월치 않았다. 무던하고 특출난 데 없는 인상에 매사 실없이 웃는 낯짝. 그는 쉽게도 유능한 밀정이 되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재능이라 불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재능을 망가뜨리기 위해 평생 부던히 노력하며 살았다. 코흘리개 시절에는 이것이 자신의 소극적인 성정에서 발현된 단점이라 생각했다. 머리가 좀 굵자 이를 부끄럽게 여겼고, 어울리지 않는 옷과 행실을 덮어쓰고 개성을 연기하곤 했다. 다만 나이가 드니 요즘은 그마저도 부질없음을 깨달았는지 제 삶을 거스르려 들지 않는다. 모난 데 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