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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다리 병정

더보기 그는 쉬이 잊혀진다. 숨이 붙은 것들이 으레 가진 옅은 인기척조차 가볍게 죽일 수 있었다. 그는 낙엽 위를 소리 없이 걸었고 그늘 아래 고요히 녹아들었다. 길가에서 스친 그 흐릿한 얼굴을 한나절 이상 기억하기란 수월치 않았다. 무던하고 특출난 데 없는 인상에 매사 실없이 웃는 낯짝. 그는 쉽게도 유능한 밀정이 되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재능이라 불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재능을 망가뜨리기 위해 평생 부던히 노력하며 살았다. 코흘리개 시절에는 이것이 자신의 소극적인 성정에서 발현된 단점이라 생각했다. 머리가 좀 굵자 이를 부끄럽게 여겼고, 어울리지 않는 옷과 행실을 덮어쓰고 개성을 연기하곤 했다. 다만 나이가 드니 요즘은 그마저도 부질없음을 깨달았는지 제 삶을 거스르려 들지 않는다. 모난 데 없이 ..

2차 창작/글 2022.03.15

잔열

더보기 그는 볕이 들지 않는 자리에 죽어 있었다. 닳아 부러진 손톱으로 흙바닥을 움킨 채 텅 빈 시선만을 위로 한 얼굴이 그늘 아래서 맥없이 이쪽을 응시했다. 눈길이 닿자 늦여름 더위에 반쯤 녹아내린 눈동자가 반가이 미소짓는다. 오래 기다렸어요? 수백 번을 그렸던 목소리가 꿈틀거리는 목구멍 밑에서 나직이 속삭이는 듯한 착각. 그녀는 홀린 것처럼 다가가 그 곁에 천천히 허물어졌다. 하염없이 흘려보낸 여름과 시야가 이지러드는 더위의 끝자락에서 연인의 초라한 마지막을 마주한다. 웃는 듯 보였던 마른 입꼬리를 쓸자 벌어진 입술 새로 날벌레가 들끓었다. 힘에 겨워 뱉은 옅은 숨결조차 머리 위를 뒤덮는 매미 울음소리에 묻혀 사그라들었을 어느 외로운 여름. 멎었던 시스템이 과열된 모터를 굴려 사고하기 시작했다. 어지..

2차 창작/글 2021.08.19

[이영싫] 트위터 잡담 백업

(1) 5년 후 헤랩 왼손 약지에 둘 다 반지 끼고 있을 거 생각하면 기분이 조크든요 근데 막상 반지 맞춰도 며칠 끼다가 더 안 낄 것 같지.. 설거지하다 수챗구멍에 한 번 빠트린 후로 그냥 보관함에 넣어두는 헤이즈랑 일하다가 손가락 잘리면 잃어버릴까 봐 반지 빼고 출근하는 랩터 조끼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잃어버린 랩터가 우물쭈물 나 반지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면 헤이즈 표정 좀 짜게 식는데 결혼반지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금반지 잃어버려서임 (2) 랩터랑 같이 있는 다나한테 질투하는 헤이즈 귀엽지.. 그런 거(?)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랩터도 귀엽고 평소에는 목석같이 굴면서 질투할 때는 착실하게 질투하는 헤이즈.. 얼굴도 잘났고 능력도 있고 그만큼 근자감도 쩔지만 서장님한테는 밀리니까 내심 경계하는 것 ..

2차 창작/썰 2021.01.21

[은혼] 트위터 잡담 백업

(1) 하는 말마다 무시당하고 비중도 역할도 희미하던 조연 캐릭터가 결국 쌓인 게 봇물처럼 터져나올 즈음에 타마씨 품에 안겨서 왈칵 눈물 쏟는 게 보고 싶다 길 한복판에서 애처럼 엉엉 우는 삼십 대 아저씨를 끌어안고 프로그램에 입력된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기계 아가씨.. 기계인 만큼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어떻게 보면 작위적으로 들리는 말들이지만 거기에 서러울 만큼 위로받는 관계의 야마타마 평소에는 감정과 관계에 서툰 타마한테 다정하게 이것저것 알려주던 어른스러운 자키가 정작 본인 감정을 못 추스르고 망가졌을 때 가장 먼저 타마씨한테 위로받았으면 좋겠어 (2) 타마 씨한테 비녀를 선물하는 야마자키.. 타마가 긴토키에게 선물 받아서 머리에 꽂고 다니는 나사를 엄청나게 신경쓰고 있는 중..

2차 창작/썰 2021.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