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글

후유증

차흘 2020. 4. 16. 16:25

 

 거꾸로 뒤집힌 순찰차가 불길 속에 처박혀 타올랐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의 비명이 무너진 잔해 아래 메아리치는 듯했다. 히지카타는 처참한 기분으로 파편 위를 밟았다. 검붉은 땀방울이 까맣게 그을린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야마자키가 보고한 폭발 예정 시각보다 삼십 분 이른 시간이었다. 계산에 오차가 있었던가. 그의 유능한 밀정은 망가진 시멘트 더미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언뜻 멀리서 그쪽을 보았을 때, 히지카타는 야마자키가 손에 쥔 것이 사람의 머리카락인 줄로 알았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에서 후두둑 끊어지는 그것은 엉킨 전선이었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기계의 잔해를 손에 든 야마자키가 흐느끼고 있었다. 가슴께에 닿도록 떨군 턱 아래 맺힌 물방울이 무릎 위로 떨어지고, 어느 쪽 손인지 알아볼 수 없는 토막난 손가락을 적셨다. 히지카타는 그 하얀 손가락의 주인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치솟는 불길 속에서 야마자키가 비명처럼 외친 이름을 들은 듯 싶었다. 뒤늦게 투입된 동료들이 주변을 수습하는 동안에도 야마자키는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웅크려 있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야마자키는 사흘 밤낮을 혼수상태에 있었다.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은 탓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부서진 벽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넋 나간 듯 웅크리고 있던 녀석에게는 형편 좋은 핑계였다. 히지카타는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무의식으로 도망치면서까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핏자국이 밴 붕대에 절반이 덮인 얼굴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 표정은 좀처럼 읽을 수 없지만 어딘가 지쳐 보이기도 했다. 실내 금연이라는 경고 문구에도 개의치 않고 히지카타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고요한 병실 안에 한숨처럼 흩어진 담배 연기가 환자의 여윈 뺨 위를 쓸었다. 변명 정도는 스스로 해. 남의 입을 빌릴 게 아니라. 가라앉은 목소리가 멍청한 부하 녀석을 질책했다.

 사흘 후 눈을 뜬 야마자키는 의외로 덤덤했다. 흐느끼며 울지도 않았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히지카타에게 그저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몸 상태를 묻는 질문에는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나중에라도 그가 괜한 죄책감에 몸부림치지 않도록 히지카타는 무심한 위로를 건넸다. 네가 가져온 정보 덕분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부상자는 나왔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이제껏 잠자코 듣고 있던 야마자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인명 피해가 없었어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 것 같았다. 분명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초점 없이 공중을 헤매는 시선. 정말로 없었어요? 재차 앓듯이 되묻는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부상자 서른 여섯 명, 사망자 없음. 그리고 망가진 기계 한 기. 히지카타는 대답 대신 느리게 입술을 다물었다. 야마자키가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힌 충격인지, 녀석은 한동안 상태가 꽤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실없이 웃는가 하면 내 탓이야, 하고 멍하게 중얼거리는 날도 있었다. 의사는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말했지만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던 진선조의 밀정은 그리 간단히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히지카타는 야마자키가 열린 창틀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서 있다기보다 반쯤 누운 듯 창밖으로 늘어뜨린 그의 왼팔이 공중에서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성큼성큼 다가가 야마자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떨어지려는 자와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자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야마자키는 울다가 웃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악을 쓰다가 힘에 밀려 병실 침대 위에 내던져졌다. 험악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히지카타에게 그가 흐느꼈다. 아래서 부르고 있잖아요. 그 말에 히지카타가 넌지시 내다본 바깥에는 사람의 인기척조차 없었다.

 퇴원한 야마자키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타마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장소였다. 사건 현장의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 지키지 못한 그날의 처참함이 적나라한 상흔을 드러내고 있었다. 야마자키는 콘크리트 건물이 덮친 잔해를 밤새 맨손으로 뒤집으며 그가 사랑했던 이름을 속삭여 불렀다. 망가진 기계는 하드웨어가 산산이 부서져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중추 데이터가 담긴 메모리 파일만이 살갗이 부르터 흉터 진 손 안에 들어왔다.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던 기계 아가씨는 이제 손바닥 두 뼘 안에 들어오는 야마자키의 노트북 컴퓨터에 잠들어 있었다. 의식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데이터 프로그램을 클릭하면 낡은 컴퓨터는 파일을 실행할 수 없다는 매정한 오류 메시지를 띄웠다. 야마자키는 그녀가 남긴 수많은 더미 데이터와 의미 모를 숫자가 나열된 잔여 파일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히지카타가 오후 여덟 시까지 올리겠다던 보고서를 여즉 붙들고 있는 부하 녀석을 재촉하기 위해 그의 방을 찾은 날이었다. 상사가 도깨비 같은 얼굴로 문을 열어젖힌 줄도 모르고 팔자 좋은 감찰은 두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최근의 자료가 너저분하게 널린 책상 한쪽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화면 보호기를 실행한 채 열려 있었다. 히지카타는 잠든 녀석을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한 번 흘겨만 보고 자판을 눌러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서 쓰다 만 보고서가 마지막 문장 옆에 커서를 띄워 깜박이고 있었다. 얼추 마무리한 주제에 마지막 문단을 정리하지 못해 애를 먹은 모양이었다. 히지카타는 보고서를 훑어 읽다가 문득 그 뒤에 텍스트 파일이 하나 더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커서를 움직여 확인하면 그것은 조그마한 메모장 프로그램이었다. 의미 모를 숫자와 문자의 나열. 아마도 실행되지 못해 손상된 무언가의 잔여 파일인 듯한 그것을, 히지카타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훑어보았다. 한참을 내리다 보면 끝에는 여백이 있었다. 누군가 수정한 흔적이었다. 그 여백 아래 처음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대답해 줄래요

대답해 줄래요?

 히지카타는 야마자키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옅은 그림자가 진 눈 아래가 살짝 젖어 있는지도 몰랐다. 누구에게 건네는 사과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문장을 적어 넣었을 녀석은 제법 간절했던 게 틀림없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텍스트 파일 속에 혼잣말을 흘려놓은 미련한 놈의 머릿속을 도통 알 수가 없어서, 히지카타는 책상 모서리를 툭툭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최근엔 조금 무기력한 점을 빼면 별달리 눈에 띄는 일은 없었는데. 고민 끝에 자판 위에 얹어진 손가락이 그 아래 짤막한 문장을 적어 넣었다.

몸 조심히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히지카타는 노트북을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는 잠든 부하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쳤다. 밥도 좀 제때 챙겨 먹고, 새끼야.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야마자키는 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기도 했다. 언제 오셨냐고 잠이 덜 깬 눈으로 묻는 그에게 히지카타가 보고서는 됐다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만 쉬어두라며 그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도 야마자키는 멍청한 얼굴로 애먼 목덜미를 열없이 긁적이고 있었다.

 다음 날의 야마자키는 전에 없이 밝은 얼굴이었다.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들떠 있는 그가 멀리서 달려와 점심은 드셨냐고 물었다. 목소리가 크다며 면박을 준 히지카타가 담배를 물며 식사는 했냐고 되물었다. 야마자키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몸 챙겨야죠.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어 히지카타는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칭찬의 의미로 녀석의 머리를 적당히 헤집어 주었다. 야마자키는 즐거워 보였다. 언제 그렇게 울었냐는 듯, 언제 그렇게 슬펐냐는 듯 혈색 좋은 얼굴로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수다를 떨고 다녔다. 그 기운찬 활기가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히지카타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야마자키는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았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과 사이에 마당에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방에 틀어박히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한 달 정도 흘렀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야마자키가 들고 온 보고서를 넘겨 보던 히지카타는 드릴 말씀이 있다는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야마자키는 휴가를 받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간 쓰지 않고 쌓아둔 연차가 남아 있기에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묻자 야마자키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이내 그가 조금 붉어진 목덜미를 쓸며 말했다. 대답을 들으러 가요. 맥락 없는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 히지카타가 미간을 좁히면 야마자키는 더욱 지리멸렬하게 지껄였다. 멀리 있으면 아무래도 잘 닿지 않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제가 그쪽으로 가요. 대답을 들으러요. 사고 이후의 야마자키와는 가끔 이렇게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루 일과가 피로하기도 했고, 굳이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이해하려는 대신 히지카타는 알겠다며 적당히 손짓했다.

 언질한 대로 야마자키는 날짜에 맞추어 자리를 비웠다. 제출한 휴가계에 의하면 그는 최소 열흘 정도는 둔영에 없을 예정이었다. 마침 상부에서 성가신 일이 터진 바람에 히지카타는 그의 빈자리를 인지할 여유가 없었다. 밤낮 없는 격무에 매달린 닷새가 지났다. 직속 부하 녀석이 휴가로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히지카타는 피곤한 얼굴로 지시 사항이 적힌 서류를 들고 야마자키의 방을 찾았다. 들어간다는 말에도 인기척이 없어 히지카타는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텅 빈 채 식어있는 방 안은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차, 싶어서 히지카타는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문득 히지카타는 야마자키의 방 안이 지나치게 평소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흘 넘게 자리를 비울 녀석이 최소한의 옷가지조차 챙기지 않았을까. 그제야 위화감이 느껴지는 방 안을 둘러보면 야마자키는 지갑도, 휴대전화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겨둔 채였다. 어딜 간다고 했더라, 그 녀석. 히지카타는 휴가를 청하던 야마자키와의 의미 모를 대화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대답을 들으러 간다고, 닿지 않는 물음의 대답을 들으러…….

 시선이 방 구석에 놓인 낡은 노트북에서 멎었다. 열려 있는 노트북은 배터리 수명이 다 되어 꺼져 있었다. 언뜻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히지카타는 까맣게 화면이 죽은 노트북을 서둘러 전원에 연결했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화면에 신호가 들어왔다. 커서의 모래시계가 굴러가며 마지막 정보를 불러온 노트북이 모니터 한가운데에 텍스트 파일을 띄웠다. 여전히 의미 없는 숫자와 문자의 나열. 스크롤 막대의 길이가 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히지카타는 천천히 커서를 움직여 스크롤을 내렸다. 끄트머리의 여백 뒤에는 닿지 않는 몇 마디의 혼잣말, 자신이 적어 넣은 짤막한 한 문장의 위로. 그리고,

보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저기

대답해 줄래요?

대답해 줄래요?

대답해 줄래요?

대답해 줄래요?

대답해 줄래요?

대답해 줄래요?

대답해 줄래요?

……

 그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스크롤을 더 넘기지 못하고, 히지카타는 노트북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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