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글

커튼콜

차흘 2024. 1. 11. 16:25

 

 초인종이 울렸다.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녘이었다. 아내와 딸은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로이드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이 방문하기에는 더없이 늦거나, 혹은 지나치게 이른 시간대였다. 이런 시간에 노크조차 않고 대뜸 초인종을 누른 것만 보아도 그 수준의 상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대임이 분명했다. 그는 앉은 채로 시선을 돌려 굳게 닫혀 있는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몇 분 가량의 침묵이 흘렀다.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현관 너머의 불청객은 좀처럼 물러가는 기색이 없다. 복도에서 가볍게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드는 읽고 있던 신문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가 흐릿한 불빛이 흔들리던 작은 전등의 스위치를 내렸다.

"누구시죠?"

 로이드는 현관을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문틈으로 먹먹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문 열어."

 어쩌면 기척에 반응한 것 자체가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상대의 태도는 염치가 없다고 느껴질 만큼 천연스러웠다. 늦은 시간임에도 당연히 그가 깨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 같았다. 로이드는 그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가족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기척을 죽인 발자국이 마루 위를 딛었다. 현관 앞에 선 그가 조용히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 군인가?"

"문 열어 줘."

 로이드는 건조하게 식은 눈으로 문 너머의 상대가 서 있을 공간을 내려다보았다. 묻는 말에는 대꾸도 않고 보채는 처남을 오늘은 어떤 변명으로 돌려보내야 좋을지 생각하는 시선에 고단한 빛이 어른거렸다. 문을 열어 주는 대신, 그는 고개를 기울여 문틈으로 낮게 타일렀다.

"말했잖아. 이 시간에 방문하는 건 곤란해."

 유리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대답이 내뱉듯 돌아왔다.

"누나가 보고 싶어서."

"돌아가, 유리 군. 요르는 자고 있어."

 로이드는 담담하게 대꾸하며 문고리를 슬며시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과 맞닿은 손끝에서부터 서늘하게 냉기가 올라왔다. 그는 눈길을 옮겨 현관의 시건장치가 제대로 잠겨 있는지 다시금 확인했다.

"들어가게 해 줘."

 잠긴 문이 성급하게 덜컥거렸다. 로이드는 움켜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문고리가 요란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붙들었다. 늘 그렇듯 경우 없고 성가신 상대였다. 로이드는 가만히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어르듯 물었다.

"유리 군.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그래?"

"누나한테 할 말이 있어."

"지금은 안 돼. 꼭 해야 할 말이라면 내가 전해 주지."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슨해졌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에 풀이 죽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로이드는 상대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억지가 통하지 않자 전략을 바꾼 듯, 곧 한결 기세를 굽힌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채근했다.

"너무 추워. 문 열어 줘."

"이 시간에 찾아오니까 추운 거야. 어서 돌아가."

"옷이 젖었어. 들어가서 좀 말리고 싶어."

 아이가 조르는 듯한 투였다. 고집은 한풀 꺾였을지언정 쉽사리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로이드는 문득 베를린트 하수도의 불쾌하고 눅눅한 공기를 떠올렸다. 그는 되도록 감정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가 온 적도 없는데 이상하군. 네 집에도 갈아입을 옷 정도는 있잖아."

 냉담한 반응에 반비례하듯 문 밖의 상대는 조금 더 성마른 기색이었다. 쿵, 움켜쥔 주먹이 현관을 묵직하게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유리는 어떻게든 닫힌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처럼 목매는 소리로 다그쳤다.

"앞이 안 보여서 걷질 못하겠다고."

"괜찮아.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으니까."

"머리가 아파서 균형을 못 잡겠어. 문 열어."

"네가 그 정도로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로이드는 조용히 대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날이 서는 말투를 의식해 입술을 문 참이었다.

"이봐. 매정하게 굴지 말고 문 좀 열어 줘……."

 우린 가족이잖아. 먹먹하게 먹혀들어가는 목소리가 울먹이며 속삭였다. 로이드는 지독하게 무거워진 눈꺼풀을 눌러 감았다. 내내 불쾌함을 견디고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제 앞에서 이렇게 매달리듯 간절해진 처남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로이드는 닫힌 문 위에 이마를 대고 힘이 빠진 몸을 기대었다.
 
 그는 복잡하게 뒤엉키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알던 남자가 어떤 류의 인간이었는지 찬찬히 되새겨 보았다. 가족이라니, 나와 그가? 그 따위 같잖은 호소에 마음이 흔들릴 관계였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일도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로이드가 손끝으로 잠긴 문 위를 툭 건드렸다. 그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리 브라이어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

 문 너머에서 애원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이내 유리가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낮게 이어지던 웃음소리가 점차 날카로워졌다. 로이드는 복도 전체에 울려퍼지는 소름끼치는 폭소를 괴로운 듯 듣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 깔깔대던 음성이 조롱하듯 물어 왔다.

"이런 방식은 안 어울리나?"

 한순간 사납게 돌변한 음성이 거친 소리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힘껏 두들겨대는 현관이 부서질 듯 덜컹거렸다.

"쓰레기 같은 자식. 교활한 위선자 스파이 놈, 문 열어!"

 로이드는 말라붙은 입안을 적셨다. 그는 매서운 기세로 자신을 매도하는 상대를 달래듯 간신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진정해. 요르가 자고 있어."

"죽어 버려! 죽어 버려! 문 열어, 로이드 포저!"

 아랑곳없이 현관을 걷어차는 발길질이 거세졌다. 당장 문을 열라고 윽박지르는 고함소리가 투박하게 갈라졌다. 썩어 문드러지는 하수도의 역한 악취가 스멀거렸다. 문 밖의 그것이 절규하듯 울부짖었다.

"전부 당신 탓이야. 네가 모두를 속였으니까! 네가 그녀의 가족을 해쳤으니까!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으라고!"

 로이드는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쥐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을 떼었다.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는 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말려들지 않기 위해 로이드는 소란스레 덜컹거리는 문고리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유리일 리가 없었다. 그는 처남이라는 남자를 잘 알았다. 어쩌면 아내가 모르고 있는 부분조차도.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닌 문 밖의 누군가를 향해 황혼은 발작적으로 되뇌었다. 입 닥쳐, 유리 브라이어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니까.

 유리 브라이어는 새벽에 찾아오지 않는다.
 유리 브라이어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유리 브라이어는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현관을 두들기던 발길질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잡아먹힐 듯한 고요 속에서 식은땀에 젖은 몸을 떤 로이드가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을 해라, 황혼. 유리 브라이어라면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이미 경쾌한 얼굴로 현관을 열어젖히고 말 같지도 않은 시비를 걸어 댔을 터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기묘한 이야기였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초인종 같은 건 울리지 않았다. 문을 부술 듯 두들기며 들여보내 달라고 울부짖는 남자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죽은 처남이 새벽마다 집에 찾아온다니, 그런 비상식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 너머에 버티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끔찍한 죄책감 덩어리였다. 그날 그가 숨통을 끊어 하수도 아래로 던져 버린 누군가의 형태를 한. 황혼은 그것이 자신의 집 안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입구를 틀어막았다.

 요르 브라이어는 동생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요르 브라이어는 남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요르 포저는 로이드 포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곱씹고 있으면 어느새 현관을 넘어와 귓가 바로 근처를 맴도는 잡념이 처남의 목소리를 하고 쉼 없이 속삭였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언제까지? 로이드 포저, 그 바보 같은 평화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봐, 언제까지…….

 언제까지냐고 묻잖아, 이 거짓말쟁이야.

"로이드 씨."

 이름을 불린 것을 깨닫고 그는 눈을 떴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밖이 어스름한 것으로 보아 시간은 여전히 새벽녘이었다.

"악몽을 꾸고 계신 것 같아서요."

 소파 위에 뉘었던 몸에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쓸어 주는 손길에 조심스러운 염려가 묻어났다. 로이드는 가만히 마른침을 삼켜 가라앉은 목을 축였다.

"미안합니다. 잠을 깨운 모양이네요."

"아니에요. 아냐 양이 목이 마르다고 해서 나왔다가."

 고개를 들면 어머니의 등 뒤에서 얼굴만 살짝 내민 어린 딸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흉터가 남은 오른팔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런 일이 있어도 여전한 가족이었다. 이곳에 섞여 있으면 로이드는 어떠한 번민 속에서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는 딸아이가 다가와 그의 무릎 위로 기어올랐다. 로이드는 익숙하게 작은 몸을 추슬러 안아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임무에 지나지 않는 가짜 가족이라고 한들 그는 변함없이 이 희극의 주인공일 터였다.

"…… 유리 군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요?"

 로이드는 옆에 놓인 소파에 앉은 요르를 향해 담담한 질문을 던졌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며칠째 실종 상태인 처남의 안부를 묻기에는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기만으로 뒤덮인 질문을 하는 중에도 그녀와 태연히 눈을 마주칠 수 있을 만큼 그는 노련했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요르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착잡해진 기색을 숨기지 않은 그녀가 작게 달싹이는 입술을 열었다.

"아직이네요. 최근에도 일 때문에 바쁜 모양이었지만요……. 그래도 안부 연락은 잊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렇네요. 조만간 시간을 내서 찾아가 보는 게 좋겠군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얼굴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걱정을 연기한다. 로이드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죄악감이라는 감정은 그 직업에 몸담기 시작한 순간부터 진작에 거세되었을 텐데도, 그는 아직 이 희극을 유지하기 위한 그녀의 계약 조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이드는 얼핏 새벽녘에 잠이 깨어 피로한 사람이 그러하듯 천연스레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걱정시킬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더이상 발목 잡힐 일이 없는 해방이 될 것인가, 도리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릴 계기가 될 것인가. 나에게 있어서, 나아가 국가와 임무에 있어서는……. 조용히 다문 입술 뒤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중에도 황혼은 스스로에게 어렴풋한 모멸감을 느꼈다.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는 스스로가 아직 인간임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 로이드가 처남의 부재에 대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였다. 그리 길지 않았던 독백을 깨뜨린 건 소매를 가볍게 잡아끄는 딸의 부름이었다.

"아버지."

"왜 그러니?"

 딸은 얼마 전부터 부쩍 말수가 적어진 참이었다. 아이는 요 며칠 내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끔찍한 소음을 견디듯, 몸을 웅크린 소녀가 아버지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속내 모를 아이는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직도 문을 두들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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