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글

[下] 낙화

차흘 2023. 2. 6. 21:04

 

 어떤 미래는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소녀는 침대맡에 앉아 있는 반려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완전한 일몰이 지난 시각이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무구한 눈동자가 새카맣게 빛났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가 긴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내민 반려견이 축축한 혓바닥으로 뺨을 핥아 주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하얀 꼬리가 바닥을 쓸었다. 이불 끄트머리를 그러쥐었던 작은 손이 부드러운 털로 덮인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소녀는 곧 몸을 일으켜 짧은 다리로 바닥을 딛었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흘러든 달빛이 복도를 비추었다. 발소리를 죽여 아버지의 방 앞으로 다가간 소녀는 닫힌 문 위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었다. 아이의 머릿속에 괴롭고 난잡한 속삭임이 스멀스멀 흘러들었다.

 

 얼마간 그러고 있으면 조용히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아버지의 얼굴은 유난히 피로해 보였다. 그가 몸을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 품에 안긴 소녀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맥없이 칭얼거렸다. 커다란 손이 조그마한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아버지의 어깨에 뺨을 비비는 어린 딸이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소녀는 아버지가 짓고 있는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어. 입술을 거치지 않은 나직한 탄식이 뇌리를 울렸다. 소녀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그 고통스러운 방백을 읽어들였다. 이것은 분명 소녀가 꿈꾸었던 미래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단단한 목을 끌어안으며 소녀는 닷새 전의 일을 생각했다.

 중간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반려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무서운 미래를 보고 있었다. 소녀는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그 앞에 꿇어앉았다. 소리 없는 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진 것을 보아 해질녘의 일인 것 같았다. 무어라 고함치는 외삼촌이 아버지의 눈앞에 총구를 겨누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득하게 열화된 화상이 흩어지고, 이번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비쳤다.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시든 꽃을 들어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아, 삼촌이 선물한 꽃. 작은 두 손바닥이 반려견의 복슬복슬한 얼굴을 붙들었다. 소녀의 가슴께가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삼촌이 아버지를 죽여서 어머니가 슬퍼해?

 

 커다랗고 점잖은 개가 대답 대신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조그마한 입술이 나직이 숨을 들이켰다. 단발적인 광경으로 아이가 유추할 수 있는 바는 그 정도였다. 그러나 소녀는 이것이 결코 유쾌한 미래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거짓말쟁이뿐인 가족들을 소녀는 더없이 사랑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장식장 위의 빈 꽃병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까지 꽂혀 있던 장미가 치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다. 예고된 비극이 다가오기 전까지 소녀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어떤 미래는 노력하면 분명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는 거실을 가로질렀다. 소파 위를 기어오르는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구석에 몸을 웅크린 소녀가 작은 머리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의 풍경은 이질적일 만큼 평소와 같았다. 부엌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식탁 앞에 선 아버지가 소녀를 손짓해 부를 때쯤, 현관에서 경쾌하게 초인종이 울렸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지만 가족들은 익숙한 기색이었다. 평일 이 시간에 집에 들를 만한 건 한 사람 정도였다. 반가운 미소를 지은 어머니가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문이 열렸을 때 소녀는 희미한 불운을 예감했다. 싱글싱글 웃는 삼촌이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하얀 난꽃이다. 소녀는 옆에 선 아버지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어머니는 깨끗한 새 꽃을 받아 꽃병에 소중히 꽂아 두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그것이 끄트머리부터 노랗게 타들어 바스라진 장면을 보았다. 머잖아 시들어 버려지게 될 꽃.

 

 경황없는 퇴근길에 잠깐 들렀다는 모양이었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어머니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것을 부드럽게 거절하는 목소리가 아쉬운 티를 내었다. 조만간 다시 방문하겠다는 처남이 문고리를 잡았을 때, 아버지는 딸의 학력평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모쪼록 여건이 된다면 들러 달라는 예의상의 권유였다. 고개를 돌려 조카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썩 내키지 않는 빛이 묻어났다. 여유 내기가 쉽지 않다며 대꾸하는 투가 은근한 시비조로 변해 있었다. 아이는 잠시라도 더 그를 붙잡아 둘 핑계가 필요했다. 어린 조카가 팔을 뻗어 삼촌의 소맷자락을 확 잡아끌었다. 삼촌은 퉁명스레 표정을 구기면서도 순순히 허리를 숙여 주었다. 발뒤꿈치를 든 아이가 귓가에 속닥거렸다. 촌, 아버지랑 싸우면 안 돼.

 

 그는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며 잠시 누나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곧 귓가에 마주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실없는 소리 말라고 딱 잘라 쏘아붙였다. 가볍게 소매를 털어 뿌리치려는 손길을 아이가 조급하게 다시 붙들었다. 난데없이 심기를 건드리는 얄미운 꼬마를 노려보는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딸에게 붙들린 남동생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핑곗거리를 찾는 눈동자가 도륵 굴러갔다. 소맷자락을 놓아 준 소녀는 삼촌에게 수학 숙제 풀이를 부탁했다며 소심스럽게 둘러댔다. 삼촌은 반박하려는 듯 잠깐 입을 열었다가 관둔 눈치였다. 어머니는 기쁘게 작은 탄성을 뱉으며 다음 주말에 쿠키를 구워 놓겠다고 거들었다.

 

 아이는 돌아가려는 삼촌을 한사코 1층까지 배웅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성가시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하는 수 없이 미지근한 손을 잡아 주었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며 소녀는 쉼 없이 조잘거렸다. 아버지가 얼마나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지, 그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가 있어 그녀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삼촌이 결국 잡았던 손을 뿌리치며 신경질을 냈다. 짜증스레 집으로 돌아가라고 쫓아 보내려는 찰나 어린 조카가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한껏 서러운 얼굴로 울먹였다. 아버지 없으면 어머니가 울어 버려. 걸음을 멈춘 삼촌이 맥빠진 얼굴을 했다. 그가 몸을 숙여 서툰 손길로 눈꼬리를 닦아 주고, 끝내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약속한 후에야 아이는 훌쩍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소녀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더없이 사랑하는 삼촌은 틀림없이 그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미래는 노력해도 기어이 바꿀 수가 없었다. 지금 아이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는 따뜻한 손길이 그 방증이었다. 이 이야기에 어쩌면 다른 결말이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오직 소녀 자신만이 알았다. 아이가 사랑하는 가족이 끝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소녀가 꿈꾼 미래는 아니었다. 삼촌이 두고 간 꽃이 조금씩 시들어 가고 있었다. 가여운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두 남자 덕분에 그녀는 끝까지 이 희극의 본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수학 숙제는 아직 다 끝내지 못했다. 그 서툰 손길을 떠올리자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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